교양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 품격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클래식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심결에 보는 '틱톡 영상'처럼 클래식도 취향 중 하나일 뿐이며 이런 취향들은 다른 취향과 공존할 수 있다. 특별하게 품격있는 삶을 연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이 차려준 당신의 다양한 밥상에 한가지 반찬 하나를 더 곁들여 보자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 주는 특별한 점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의 매력을 찾지 못지 못한 이들에게 클래식을 들을 때 내가 각별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이 있는지 나눠보고자 한다. 우리의 감각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미각, 시각, 촉각, 청각, 후각 등이 그렇다. 이를 오감이라고 부른다. 오감은 모두 인간에게 중요한 감각이지만 이 감각은 모두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하기 힘들다. 촉각은 압력감각과 온도 감각을 통해 외부의 자극을 감지하는 감각이다. 이는 통증을 인식하여 외부로부터 보호 받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접촉을 통해 이뤄지는 감각이므로 예술의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힘들다. 미각과 후각 또한 몹시 중요한 감각중 하나다. 다만, 이는 교육에 의해 길들여지기 쉬운 감각에 속한다. 쉽게 말해서, 어린시절 싫어하는 맛과 향이라도 문화와 교육에 따라 자주 접하면 길들여지는 순수성이 크지 않은 감각일 수 있다. 또한 시공간의 제약을 크게 받는다. 무한한 맛과 향은 없으며 이것이 주는 감동의 지속은 길지 않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각'과 '청각'이다. 시각과 청각을 담당하는 감각기관은 '눈'과 '귀'다. 이는 전혀 다른 감각기관 같지만 그렇지 않다. 청각과 시각 모두가 '떨림'을 감지하는 감각 기관이다. 이 두 기관은 모두 주파수를 인식하는 기관인데, 귀는 16GHz~16kHz까지, 눈은 384THz~789THz의 영역을 감지한다. 이 모두 '떨림'을 감지하는 기관이다. 이 두 감각기관의 장점은 '원거리 감지'라는 특장점이 있다. 예술은 불특정 다수에게 확산되는 과정에서 '원거리 감각기관'의 손을 들어준다.
'원거리 감각기관'은 전파력이 높다. 직접 손바닥 위에 메모를 해주는 행위보다 전파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빠르고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것 처럼 말이다. 미술과 음악의 확산이 '음식'과 '향', '의복'보다 빠른 것은 그런 영향에 있다. 시각은 청각보다 더 미세한 파동을 감지한다. 다만, 청각과 시각 중 더 빠르게 전달되는 것은 시각이다. 청각보다 88만배나 빠르다. 다만 특정 환경에서의 원거리 전달력은 '소리'가 압도적이다. 어두운 환경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은 '시각'보다 '청각'이 압도적이다. 인간사회에서 문화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선택받고 전파되기에는 '음악'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또한 시각과 청각은 인간의 감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인간의 뇌는 감정에 따라 각기 다른 뇌파 활동을 보여주는데 이또한 떨림 혹은 파동이다. 클래식은 보편적인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자극한다. 즉,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시아의 어느 지역 사람이 듣더라도 언어를 초월한 감동을 줄 수 있다. 인간의 기본적 속성은 '구분'하고 '정의'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가 '언어'다. 만약 한 남자가 운명의 상대를 만난 순간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라고 말을 했다고 해보자. 다시, 한 여성이 다른 남성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라고 표현 했다고 해보자. 이 두가지 경우, 각각 인물마다 느낀 감정은 모두 다르다. 다만 그것을 '사랑에 빠졌다'라는 말로 정의함으로 그 감정의 곁가지를 모두 쳐낸다. 이처럼 일반화할 수 없는 '감정의 형태'를 언어로써 일반화하는 것을 '언표한다'라고 한다. 인간은 '언표'를 함으로써 대략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나, 그 감정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이것을 노자는 '도가도 비상도'라고 표현했다. '가사'는 미묘한 감정의 떨림을 깍뚝썰기 하듯 '또각 또각' 난도질한다. 각자 다르게 느낄 감정에 재단된 감정을 집어 넣는다. 고로 사용하는 언어마다, 성별마다, 나이마다 모두 다르게 느끼게 한다.
클래식은 '인간 보편적 감성'을 온전히 느끼도록 해준다. 언어의 간섭없이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느끼도롭 돕는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6번의 선율은 아름답고 마음이 편해진다. 18세기 오스트리아 국적의 인물이 표현한 감정의 선율을 21세기 대한민국의 내가 들었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언어장벽'도, '세대차이'도 없다. 사람은 모든 감정과 상황을 언어로써 표현할 수 있다고 자만할 수 있으나, 인간의 감정은 원래 규정지어질 수 없는 다양한 복합체다. 그것은 선처럼 이어져 있고 어둠과 빛처럼 그라데이션되어 있으며 무드링처럼 언제 변하는지 모르게 변해간다. 모호함 투성이다. 그것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이 '클래식'이다. 시대별로 나눠 보자면 바로크 시대에 헨델과 비발디, 바흐 등은 질서와 안정을 노래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조화와 통일을 노래한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등의 작품이 그렇다. 바그너, 쇼팽 등의 낭만주의 시대에는 자유로움을 노래한다. 특정적인 감정을 인위적으로 부여한 것이 아닌, 감상자가 주체성을 갖고 해석할 여지가 얼마든지 열려 있다. 이는 '독서'와 어느 부분이 일맥한다. 흔히 '영상매체'를 접한 이들보다 '독서'를 즐기는 이들이 더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이유를 '능동적인 해석'에서 찾는다. 영상매체는 시청자의 해석이 개입할 여지를 현저히 줄어들게 만든다. 다만 독서는 그 폭을 무한대로 확장시킨다. 능동적으로 해석한다. 가사가 있는 노래와 없는 노래 또한 비슷하다. 강제적으로 가사를 넣고 듣는 이에게 수동적인 감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음율을 통해 환경을 부여하고 듣는 이로 하여금 능동적인 해석의 여지를 충분히 열어 두는 것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누군가는 슬픔을, 누군가는 감동을, 누군가는 기쁨을 느낄지 모른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자. 이제 감동하세요'라는 설명서는 지극히 인위적이다. 인간의 취향에는 언제나 독서와 클래식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틱톡과 유튜브, 힙합과 발라드도 각자 그 역할을 충분히 한다. 다만 시공간이 차려 놓은 다양한 즐길거리에 한 번 더 관심을 갖는 것도 삶을 즐기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지 않을까 싶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