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국가가 멸망하더라도 복수 한번만 할 수 있다면

매국노 고종 독후감

by 오인환

"한 번 복수의 뜻을 달성할 수 만 있다면 설사 국가가 멸망하더라도 감히 마다할 바가 아니다."

1896년 2월 15일, '국왕아파천계획에 관한 보고'에 따르면 고종은 왕비 민씨 살해 사건에 이와 같이 말했다. 왕비를 잃은 슬픔에 대해 충분히 인간적인 공감은 가능하다. 다만 한 국가의 지도자의 언변치고는 생각할 거리가 많다. 한 번의 복수를 할 수 있다면 국가가 망해도 괜찮다라... 교과서에서 고종은 독립투쟁 상징이며 근대화 개혁을 지휘하고자 했으나 시대를 잘못 타고 난 '망국'의 불운한 황제였다. 언제나 외로웠으며 고뇌하는 왕이었다. 인간의 모습이 단면적이라고 볼 수 없으나, 고종황제의 기록은 참으로 다변적이다. 1913년 8월 29일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고종의 일상은 다음과 같다.

'당구장에서 공을 치는데, 극히 재미를 붙여 여자관리들과 함께하신다. 여름에는 서늘한 때에 석조전에서 청량한 바람을 몸에 받으시며 내인들에게 이야기 시키고 축음기 소리도 즐거워 하신다."

이런 기록은 과연 왜 있는 것일까. 1913년이면 경술국치 3년 뒤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에 자결한 '황현'은 '고종의 곡연유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고종은 놀기를 좋아하며 밤마다 잔치를 베풀고 음란한 생활을 하였다. 광대와 무당, 소경들도 노래를 부르고 거스름을 피웠다. 대궐에는 등불을 대낮처럼 환히 밝히고 새벽이 되도록 놀다가 4~5시 내지 7시경이 되면 휘장을 치고 어좌에 누워 잠을 자고 오후 3시나 4시에 일어났다. 이런 일을 날마다 반복하므로 나이 어린 세자는 습관이 되어 아침 햇살이 창가에 비추면 두 사람 옷을 붙들고 '마마, 잠자러 가요.'하고 졸라댔다."

인간의 여러 면 중, 단면적인 부분을 떼어나면 그렇게 보인다고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다만 1905년 미국공사 알렌의 기록은 더 기가 막히다. 그는 한반도에서 10여 년간 머물다 귀국했다. 이 때 사람들에게 탄식을 했는데, 자신이 9만리를 돌아다니고 위아래로 4천년의 역사를 봤지만, 한국황제 같은 사람은 처음 봤다는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백성을 외국 군사로 진압하자는 제안도 '고종'의 입에서 처음 나왔다. 우의정 정범조와 좌의정 조병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려도 청나라가 영국군을 빌린 적 있다는 일화를 빌어 적극적으로 '청나라' 군대로 난을 진압하자고 한다. 백성을 아끼고 국가를 마지막까지 수호해고자 했던 '비운의 국왕'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 18세기에서 19세기 전반까지 조선의 재정은 부가세를 포함하여 대략 400만 석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고종 시대에는 그 규모가 절반으로 줄어 재정이 악화된다. 고종의 재정악화는 세금탕감과 철폐 그리고 화폐개혁 때문이었다. 이로인해 재정이 크게 악화되자, 그는 묻는다.

"예전에는 급하게 쓸 일이 생기면 10만 냥이라도 어렵지 않게 마련했는데, 근래에는 어찌하여 옛날 같지 않는가?"

고종의 말에 대신들은 곡식 장부가 현재는 넉넉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에 영의정이 경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고종은 경비 문제는 의정부에서 알아서 해야지 어떻게 하겠냐고 답했다.

사대문 안에 곡식창고를 신축해야 할 정도로 재정이 부유했던 살림은 그렇게 2년 만에 붕괴됐다. 1881년에는 국고에 청전이 44냥 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 국고에는 청전 보유량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 해가 하급 군인들이 급여를 받지 못해 반란을 일으켰던, '임오군란'의 해다.

고종 시대에는 토목공사를 크게 벌이고 화폐 개혁에 실패한다. 이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많은 백성이 곤궁해졌다. 국가가 위기에 빠지자 그는 복을 내려주는 제사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에 관직 임용에 뇌물을 받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이를 직업으로 삼는 일본 임대업자가 등장하기도 했단다. 이들은 관직을 원하는 자에게 뇌물자금을 빌려주고 월 12%의 이자를 받았다. 1899년 프랑스공사인 드 플랑시가 본국인 프랑스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뇌물은 황제에게까지 올라가며 땅과 백성은 황제가 원하는 대로 처분할 수 있는 황제의 소유물이라고 기록했다. 이 말이 꽤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봉상사 부제조 송규헌'의 상소 때문이다. 송규헌은 '조정 대신들이 죄다 자격미달'이라며 이들을 내쫒고 네 가지를 개선하라고 말한다. 그 네가지가 '궁궐 공사 중단', '벼슬팔이 중단', '무명잡세 철폐', '이것들을 실현' 이라고 할 정도였다.


1905년, 고종 근처에서 대한제국을 지켜보던 '호러스 알렌'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백성들은 스스로 통치할 수 없다. 이들은 주인이 필요하다. 황제는 이 나라에 끔찍한 해충이며 저주다. 그는 로마를 불태우며 놀아난 네로와 다를 바 없이 무희들과 놀면서 시간을 축낸 지도자다. 한국인에게는 전쟁이 더 나은 조건일지도 모른다." 고종에 대한 다양한 기록은 읽을 때마다 충격적이었다. 대한제국의 헌법에 대해 당대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외교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주가 모든 권한을 장악하며 이 헌법 승인 하에 그가 커다란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인민에게 이해시키려고 합니다. 이 헌법에 거역하는 모든 신민은 모든 시민권을 박탈하고 추방할 것 이라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 달 보름'만에 나온 이 헌법은 '자주독립'을 1조로 규정한 뒤에 8조까지 내리 황제의 권리와 황민의 의무로만 가득차 있었다.

예전 명성황후를 부르는 호칭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명상황후'를 '민비'로 부르는 일에 대해 일본이 낮춰 부르는 칭호라는 것이다. 역사에서 '일본'이 '절대악'으로 규정되면 조선의 무능은 어느정도 감춰진다. 실제 개인의 일상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남 탓하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 핑계를 외부에서 찾으면 내부는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만족감'과 '합리화'가 생긴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는 '존재' 자체만으로 '일본'과의 역사적 감정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고로 다양한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서 많은 부분이 미화되기도 한다. 다만 우리 역사책을 살펴보자면 피할 수 없는 모순을 만날 때가 있다. 중국과 일본의 교과서를 문제 삼으며, 우리의 역사관이 가장 합리적인 역사관이라고 믿기도 한다. 다만 교과서가 가르쳐 주지 않는 다양한 관점을 보기 위해선 사람과 상황, 역사에 대해 이처럼 다양한 관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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