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잔 첫번째 이야기 3

1-3 빠져나온 사람

by 이세

윤경이 알기로는 그 사수는 늦게 장가를 가서 아직도 신혼인 듯 이제 돌이 막 지난 아들이 있었다. 사무실에서 아주 애처가 공처가로 놀림도 많이 받던 터였다. 아무리 비디오를 되감기 해도 윤경의 머릿속에 딱히 짚이는 장면이 없었다. 그저 업무를 배우기 위해 사수 책상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자주 근처에 있었다는 것, 종종 점심을 함께 먹은 것 등이었다. 이제 정말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윤경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지금 막 열차에서 내렸으며 곧 역 앞으로 나가겠 노라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발걸음이 처지지 않으려 일부러 또각또각 구둣발에 힘을 실었다. 잠시 잠깐 남은 학자금 대출이 얼마였던가 생각이 스쳤다. 저 멀리 개찰구 앞에 그의 훤한 정수리가 보이며 더 환하게 웃는 그의 아련한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는데 명치가 체한 듯 묵직했다. 사수는 윤경을 지하철 역 스타벅스로 데려갔다. 중요한 할 말이 있다면서. 윤경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윤경이 먼저 입을 떼었다.

“차장님, 정말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는데 저 너무 불편해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야아아옹”

윤경의 감정이 격앙되며 오레오의 이마에 가해지는 압력도 불편했던지 갑자기 오레오가 기지개를 켜며 테이블 밑으로 내려갔다. 윤경은 목이 타는 듯 빈 잔을 자꾸 들어다 놓다가 안 되겠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언니, 저 한잔만 더 주세요. 이거 같은 걸로요. 요거 정말 좋네요.”


테이블 위에 팔짱을 껴고 윤경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혜진은 몸을 일으켜 컵을 깨끗이 닦고 다시 셰이커와 리큐어들을 꺼내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계속해봐. 너무 궁금하다. 그래서 그 사수가 뭐래?”


손은 분주히 움직이며 고개를 살포시 들어 미소 짓는 혜진을 바라보는 윤경의 표정은 여전히 아리송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게 정말 너무 어이가 없어요. 진짜로요”


모두가 출근하느라 바쁘게 걷고 잠시 들러 카페인을 채우기 위해 커피를 사가는 그곳, 아침 8시 스타벅스에서 윤경은 사수에게 절절한 사랑고백을 들었다.

“나 자꾸 네가 마음에 들어온다. 그리고 나 이 사실 아내한테도 이야기했어.”

“네에?”

“오늘 아침에도 당장 사무실을 찾아와 너의 머리채를 잡겠다는 아내를 말리느라 한참 힘들었어”

“아니 그니까 도대체 왜 차장님 사모님이 저를 찾아와서 제 머리채를 잡느냐고요. 왜?”


윤경이 당혹감과 억울함, 답답함을 곱씹으며 간신히 내뱉은 한마디는 그게 전부였다. 약간의 침묵 후 윤경은 이제 사적으로 문자나 전화는 자제 부탁드린다고 말하고 꾸벅 인사하고 스타벅스를 나와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그 뒤로도 몇 번 질척임은 있었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윤경은 인사부에 직접 사표를 출력해 부서이동을 요청했고 그다음 해 바로 업무지원부로 전출이 되었다. 입사 첫 해 윤경이 가장 똑 부러지게 잘한 일이었다. 그 후로 윤경은 불편한 마주침 없이 자신만의 커리어를 잘 쌓아 여기까지 왔다. 악몽 같았던 입사 첫 해를 가슴에 묻고 나니 더 지난한 세월이 길긴 했던 것 같다. 회상에 잠긴 두 여자의 분위기가 지겨운 듯 오레오는 입구 문에 혜진이 따로 만들어준 고양이 전용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 작은 구멍으로 찬바람이 제법 시리게 들어왔다.

“진짜로 정말 아직도 모르겠어요. 대체 이유가 멀까?”

윤경이 우스개 소리처럼 작은 에피소드를 하나 더 말해줬다. 정장과 구두를 고수하던 사무실 드레스코드를 따르기 위해서 신입사원 윤경이 어느 날은 커피색 팬티스타킹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고 한다. 20개짜리 벌크로 묶어파는 그런 흔하고 흔한 스타킹을. 그런데 주문하고 며칠 지나서 사수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없이 그녀에게 작은 박스를 쓱 건네어주었다고. 박스를 건네어받고 윤경은 황당함에 얼굴이 벌게졌다고 한다. 그 택배박스에는 품목이 “커피팬티”라고 적혀 있었다.

“아니 설마, 이것도 뭔가 문제가 되었을까요?”

살짝 격앙된 윤경의 목소리는 이미 탄산보다 더 톡톡 터지고 있었다.

“더 화가 나는 건요, 오늘 인사발령 공문에 그 사람 이름이 있더라고요.”

“어? 왜?”

“아니 글쎄, 그 인간이 어디 대외홍보부 부서장 된 거 까진 들었는데 오늘 보니까 그룹 임원이 된 거 있죠? 세상에 도대체 조직은 무슨 기준으로 사람을 뽑고 돌리고 승진시키는 거죠?”

“……”

혜진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레코드가 한 바퀴 다 돌고 잠시 멈췄다. 혜진은 조용히 바늘을 다시 내려놓았다. 피아노 연주가 다시 처음처럼 흘러 트랙의 두 번째 곡인 “Riverside”를 재생하기 시작했다. 그 몽환적이지만 감싸 안아주는 느낌에 홀리듯 결제한 음반이었다. 윤경은 피아노 건반을 따라 테이블에 손가락을 튕겼다. 차분하고 반복적인 선율에 몸을 맡긴 윤경은 왜 인지 돌아가는 음악과 다르게 자신이 더 이상 그 시절을 붙잡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이 노래 참 이상하죠”

윤경이 말했다.

“계속 돌아오는데, 이상하게 빠져나온 것 같아요.”


“달잔”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혜진은 그저 고요히 윤경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제야 후련하다는 듯 윤경은 프렌치 75를 한 모금씩 목으로 넘기며 작은 한숨을 불어 쉬었다. 내일 출근해야 하지만 지금 이 시간 이 기분을 조금은 만끽해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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