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너무 오랫동안 나한테만 기댔잖아. 아버지를 적으로 만들고 같은 편이 되어서 두들겨주기를 바랐고 아버지 없는 곳에서 내가 대신 욕받이를 해 줬고 한풀이를 들어줬고 이제 가고 나니까 그립다는 듯 아버지와의 추억만 꺼내는 게 참으로 가증스럽다고 해야 할까. 자식은 눈곱만큼도 배려하지 않고 잘못 만난 남편 험담을 '너그 아부지가.너그 아부지가'하면서 끝도 없이 내질렀잖아. 앞으로 내 앞에서 아버지 얘기 하지마. 살아생전 욕만 하다가 왜 갑자기 그리워하냐. 이 엄청난 이율배반, 자가당착, 모순을 사람들은 알까?
팔십이 넘어도 예전에 착했던 그 딸을 기억하며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한평생 진심으로 해 오던 그것이 이제는 하기가 싫어졌어. 물질은 주지만 정서적인 것은 이제 마르고 말랐어. 엄마의 감정선에 같이 분노하고 같이 슬퍼했는데 이제 내 감정이란 걸 갖고 싶어.
엄마를 못 살게 굴던 아버지가 없으니 더 이상 지난 일들을 되새김질할 필요도 없고 아버지가 준 상처를 다시 아버지에게 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지난 감정을 다시 퍼올리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살아.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엄마의 희로애락에 같이 웃고 울고 하고 싶지는 않아. 내 감정대로 살고 싶어. 그래서 '저 딸이 왜 갑자기 차가워졌나?' 하겠지만 이제야 독립된 감정을 갖고 살아갈 거야. 내가 많이 지쳤다는 걸 엄마는 아직도 모르는 거야. 자기감정만 중요하니까. 엄마도 죽지 못해 살았으니까 이해는 하지만 이제 나를 좀 내버려 둬. 더 이상 엄마 감정으로 끌고 들어가지는 마. 엄마 생각에 동조하고 동화되고 싶지가 않아. 가난한 집 맏이가 이런 건지 몰랐어.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 내 등에 업힌 채권자들. 고맙단 소리도 못 들으면서도 혼자 의무감에 시달리는 역할을 죽을 때까지 할 것 같아. 그러나 정서적인 부분까지 채워달라고는 하지 마. 정서적인 부분만큼은 오롯이 내 거. 내가 다 가질 거야. 물질은 내줄 수 있어. 거기까지만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