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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by 신기루

가끔 언니라고 부르는 이가 있다. 직장 동료였지만 오랜 시간 지내다 보니 언니 같을 때도 있으니까. 20년을 보고 지낸 사이다. 그런데 어제는 그녀와 통화를 끝내고 한참을 울었다. 선을 넘은 그녀. 나를 손절하려 했다고 하니 내가 먼저 손절해 줘야겠다. 사람도 손절이라니, 하긴 그간 세월이 있으니 서로 투자한 시간과 돈도 있으니 손절이 맞다.


최근 연락이 뜨문해져서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래도 한 달에 한번 정도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두 달 전 만났을 때 우연히 아들 사진을 보여줬다. 바싹 말라 해골같은 아들 얼굴을 보더니 많이 놀라워했다. 주변에 이런 애들이 있다라면서 많이 힘들었겠다라고 하여 그 자리에서 자초지종을 말하지는 않았다. 다음에 얘기하겠다라고 하며 정말로 다음에 만나면 그간의 속사정을 얘기해주려 했다. 너무 힘들 때는 말이 안 나오는 거다.


그런데 간만에 전화를 걸어 요즘 서울 와서 아들 밥 먹이고 있다고 했더니. 대뜸.


---내가 그날 그 집 아들 보고 집에 가서 우리 아들 껴안고 '고맙다, 고맙다고 얼마나 얘기한 줄 모른다.


(얼마나 그 집도 힘들길래 우리 아들 얼굴 보고 그런 위로를 할까?)


그러면서


- 어찌 애가 저 모양이 되도록 애미는 뭐 하고 있냐. 지 입에 밥은 넘어가냐. 새서방이랑 잘만 살면 되냐 앞으로 연락이 오면 전화는 받겠지만 내가 연락하는 일은 없을 거다라며 자기 아들을 엄청 쓰다듬어 줬더니


-엄마, 왜 그래? 라길래

-그때 왜, 너한테 수학 가르쳐 준 형 있잖아. 그 형 얼굴이 아주 비틀어져서 망가져 있더라고.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언니지. 남의 불행 앞에 자신의 불행은 작게 느껴지는 법. 자식이 죽은 장례식장에 가서 난 우리 아들이 살아있어서 너무 고맙다고 하면 상황에 맞는 말일까?


설사 둘이서 껴안고 그런 넋두리를 했더라도 나한테는 해서는 안 될 말.


얼마나 힘들었냐라면서 밥 사주고 위로해 줄 것 같은데 애는 그렇게 놔두고 지는 맛있는 거 먹냐라고 나를 비난하다니. 공감력이 있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매일 밥 먹을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그러다가 이태원 참사 현장을 지나갈 일이 있어서 조문도 했는데 같이 간 지인이 '진상규명'에 서명하자고 해서 안 했단다. 왜냐하면 '놀러 가서 그렇게 된 거라며.'


그래서 그 말을 유족들이 가장 싫어한다라고 했더니 자기도 5일 전 거기 놀러 갔다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래서 놀러 가서 그렇게 된 거라고. 교통사고와 같은 거라고.


이러한 생각은 내 생각이니까. 전교조에 가입 왜 안 하냐고 묻는 것과 같다나. 그러니까 생각의 자유를 맘껏 누리시겠다는 건데. 자유라고 해서 길 한복판에 드러누울 수는 없는 거다. 옳은 생각과 틀린 생각이 있다. 생각은 자유이지만 발언을 하는 순간 책임을 져야 하고 틀린 발언에 대해서는 지탄을 받는 거다.


어제는 이제까지 알아왔던 그 언니에 대한 작은 연민까지도 완전히 접었다. 그녀가 손절을 생각할 정도의 나였으니 내가 먼저 해 주기로 했다. 나도 더 이상 사람에 대해 공감력이 제로인 그 분과는 만날 수 없다. 인간관계의 기본은 공감이다. 어제는 죽기 직전 사람의 맥박이 미친 듯 널뛰듯 그녀의 어리석은 생각들이 미쳐 날뛰는 걸 보며 더 이상 오염되기 싫다고 결심했다. 헤어질 결심.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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