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 작가 / 헤르미온느의 만능가방을 꿈꾸며
여는말: 각기 다른 분야에서 멋지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10명의 사람이 모여 매일 101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공유합니다. 10개의 질문마다 한 명씩 질문 하나를 맡아 브런치에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조유진 작가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무거운 짐도, 내려놓을 짐도 없다. 요즘 나는 툭 치면 날아갈 정도의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지내고 있다. 마음을 놓았다고 해야 하나? ‘내일은 내일의 내가 책임진다’를 모토로 딱 코앞만 보며 살고 있다. 축축 처지는 겨울 날씨와 고립되어 모두가 힘든 코로나 시대에서 마음이라도 가볍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 예전보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마음의 짐은 없으니 다른 짐을 말해볼까 한다. 또 다른 짐은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하여 챙기거나 꾸려놓은 물건'을 말한다. 나는 어딘가를 이동할 때 ‘짐’을 가져가야 한다는 사실이 괴롭다. 1시간 거리 이내의 장소에 갈 때는 가방 없이 완충된 핸드폰과 지갑만 챙겨 어떻게든 주머니에 욱여넣었으며, 본가에 갈 때도 매번 이것저것 챙겨가는 게 피곤해 여기서 쓰던 것들을 똑같이 사다 놓고 팔랑팔랑 몸뚱이만 가서 동생이나 엄마 옷을 빌려 입었다. 한 번은 토요일 아침에 서프라이즈로 본가에 갔더니 엄마는 어디 동네 놀러 온 것처럼 왔냐고 까무러쳤다.
엄마와 내 동생은 짐을 한가득 들고 다닌다. 동생은 1박 2일의 일정에도 백팩과 숄더백을, 엄마는 잠깐 집 앞에 나갔다 오는 길에도 작은 가방이나 파우치를 꼭 들고 갔다. 엄마의 가방이 궁금했던 나는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어 봤던 적이 있는데 그 안에는 놀랍게도 휴지며 작은 물티슈, 심지어 손수건까지 있었다. 엄마, 이것까지 들고 다니는 거야? 놀라며 물었었다. 동생도 그보다 더하지 덜하진 않았다. 백팩이 볼록하도록 가득 넣은 가방을 보고서 놀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것도 가져가게? 응, 추울 수도 있잖아. 이건 왜 챙기는데? 혹시 모르니까. 아무래도 엄마의 보부상 유전자는 동생에게만 남아있는 듯했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단출하게 다녔던 건 아니었다. 한때는 에코백과 파우치를 사재 끼며 행복을 느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자취를 시작하며 미니멀한 삶을 지향하게 되었고, 곧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에코백이라고 하지만 전혀 에코하지 않은 이 가방을 나는 왜 사고 싶은 걸까. 왜 나는 파우치가 이렇게 많이 필요할까. 대체 이 소비욕구는 어디서부터 왔을까. 지금 당장 필요 없는 것들을 꼭 가지고 다녀야 할까. 그럼 그냥 주머니에 넣으면 되잖아. 그거 없어도 살 수 있잖아. 그러자 내 손에 쥐어진 것들을 말 그대로 짐이 되어 버렸다. 그 순간부터는 쓸모가 없어졌던 것 같다.
내 한 몸 건사할 에너지만 남아 뭔가를 들고 다닐 힘이 없다는 것은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뭔가를 챙기고, 달래고, 어르는 것에 질려버린 것처럼 어느샌가 아무것도 달고 다니지 않았다. 가끔 1박 이상의 일정이 생길 때는 별수 없이 가방을 챙기는데 그럴 때만큼 헤르미온느의 만능 가방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텐트가 들어갈 정도면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 한들 깃털만큼의 무게일 테니 얼마나 부러운지. 현실이 마법 세계로 변하지 않는 이상 꿈에서나 메볼 수 있을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아무리 넣어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방은 없지만, 지갑과 카드 없이 핸드폰 하나로 모든 결제가 되는 세상이 온다는 걸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니 언젠가는 자유로운 두 손과 어깨를 가진 가벼운 몸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거라 기대해본다.
조유진
나를 이해하기 위한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