졍진 작가 / 내 마음에 발언권을 줘 보려구요
여는말: 각기 다른 분야에서 멋지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10명의 사람이 모여 매일 101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공유합니다. 10개의 질문마다 한 명씩 질문 하나를 맡아 브런치에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졍진 작가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최근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심리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12주 동안 주 1회 한 시간씩 1:1 상담을 받았다. 불안과 강박에 대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불안감으로 잠을 설치고, 강박 행동 때문에 집을 나서기가 꺼려지던 중이었다. 상담을 통해 나를 괴롭히는 증상들이 나아지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첫 시간에 선생님은 강박 행동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상담이 끝난 뒤에도 나아지지 않을 수 있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걸 통해 내가 뭘 얻을 수 있지. 약간의 실망과 의문을 가진 채 상담을 시작했다.
상담 시간은 내 생각과 감정에 관한 대화들로 이루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생님이 감정에 대해 물으면 나는 생각을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때 어떤 기분이었냐'라는 질문에 대답하기가 참 어려웠다. '그때 어떤 생각을 했냐'라고 물으면 한 시간 내내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답변은 항상 한 단어에 그쳤다. 힘들었어요. 불안해요. 슬펐어요. 걱정됐어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의 폭이 이렇게 좁았나. 다음 대답은 전부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어떻게 할 것인지 등 생각과 행동에 대한 설명이었다. 선생님이 짚어주기 전까지는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
부정적인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려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걱정과 불안이 느껴지면 그 상황을 벗어나려 했다.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거나,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찾았다. 내가 처한 상황을 머리로 이해한 뒤 문제 해결을 위해 행동하는 식이었다. 게임을 하듯이 또는 문제를 풀듯이 한고비를 넘기면 다음 과제가 앞에 놓였다. 삶의 매 페이지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것으로 바꾸어야 할 대상이었다.
선생님은 감정에 좀 더 집중해보라고 했다. 어떤 기분이 들 때 그걸 떨쳐버리려고만 하기보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보라고. 불안할 때는 불안을 느끼고 어째서 불안한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지금 불안하구나’, ‘내가 ~~를 걱정하고 있구나’. 그렇게 마음을 받아주어야 한다고 했다.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요? 반문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해도 마음은 조금 가벼워질 수 있다고.
선생님이 알려준 방법은 낯설고 어렵다. 나는 울다가도 시계를 봤다. 불안을 짚어보다가 이쯤이면 충분한가? 하고 고개를 들었다. 나를 얼마나 받아주어야 할지, 이게 나태나 유약함을 의미하는 건 아닌지 헷갈렸다. 사실 아직도 쉽지 않다. 일이 잘 풀렸으면 하고, 모든 것이 확실했으면 좋겠다. 내가 스스로 내 앞길을 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약해지는 자신을 닦달해서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곤 한다. 그럼에도 천천히 내 마음에 발언권을 주고 있다. 다 이뤄줄 수는 없더라도 들어는 봐야지.
나의 감정을 한동안 들여다보지 못했다. 아주 오랜만에야 멈춰서 자세히 보려 하는 중이다. 상담이 끝난 지금도 여전히 강박 행동을 한다. 불안감이 불쑥 일상을 치고 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실에 우려하기보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 한다. 가족관계, 취업, 인간관계 등 나를 둘러싼 환경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
졍진
읽고 쓰고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