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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공일일공 Jan 14. 2021

5. 막차를 쫓아가듯 열정을 쫓아간 적 있는가

졍진 작가 / 읽고 쓰고 그리고

각기 다른 분야에서 멋지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10명의 사람이 모여 매일 101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공유합니다.  매일 답변을 공유하고, 2주마다 한 명씩 질문 하나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소개할 글은 졍진님의 글입니다. 브런치를 사용하지 않는 작가님 대신 글을 올리게 되었는데요. 브런치에서 여러분들을 직접 만날 날이 곧 오기를 바래봅니다.




나는 오타쿠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다. 스스로를 오타쿠라고 소개하는 게 부끄러워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타쿠의 기질을 가졌다. 무엇 하나에 빠지면 정신없이 파고든다. 이걸 끝까지 해야겠어. 이걸 다 모아야겠어. 이걸 당장 풀어야겠어. 이런 불꽃같은 열정이 다른 욕구를 태워버리는 순간들이 있다. 잠을 안 자는 건 예사고 끼니를 거르기도 한다. 새벽 동이 트고 머리가 띵하게 아파오면 아 망했구나 하고 깨닫는다.


내 불꽃은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은 아니다. 나는 촛불이다. 그보다 더 자주 성냥불이다. 가스레인지에서 탁탁 튀는 불티다. 내가 열정을 불태우는 대상은 너무 작고 사소하고 많다.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기막힌 이야기, 그리고 싶었던 그림, 갑자기 눈에 들어온 영화배우와 그의 영화들, 지나치듯 들은 짧은 어구, 스도쿠, 로직, 그리고 솔리테어!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느 오후, 마친 일과 해야 할 일들 사이에서 퍼즐게임에 대한 간절한 욕구가 피어오른다. 휴대폰을 켜 솔리테어를 다운받는다. 한판을 하고 나면 아직 쉬는 시간이 남아있다. 한판만 더하자. 정신을 차리면 오늘이 끝나기 직전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기로 한다. 잠들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있다. 다시 솔리테어. 창밖에 동이 터온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데 이제야 피로가 몰려온다. 떨리는 손으로 앱을 지운다. 솔리테어에 대한 열정이 내 인생을 조지기 전에.


이제 왜 내가 스스로를 오타쿠라고 정의하지 않는지 알 것이다. 그들은 한 가지에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한다. 철도 오타쿠, 역사 오타쿠, 만화 오타쿠 등 자신의 분야가 있다. 나는 그런 끈기가 없다. 솔리테어 랭킹 1등이 되기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솔리테어 앱을 모으고 필승법을 공부하지 않는다. 정신 차리고 원래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양심의 소리에 쉽게 굴복한다. 결국 성실하고 자제력 있는 어른과 열정을 가진 오타쿠 사이 애매한 스마트폰 중독자로 남는다.



단발적인 나의 열정이 인생에 큰 변화를 초래하고 만 때도 있다. 중학생 시절, 기숙사 생활을 다룬 만화를 너무 재미있게 본 탓에 3학년 1학기가 다 끝난 마당에 기숙학교를 가겠다고 결정했다. 결국 집에서 4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시골학교에 갔고, 그 결정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당시의 나는 상상조차 못 했다. 그뿐인가. 대학 1학년 때 수강한 문학 교양수업을 진행한 교수님이 독일어과가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까지 격변화의 지옥에 빠져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전공보다 독일어를 더 오래 공부하고 있다!


막차를 타듯 열정을 쫓은 적 있냐고. 답은 예스X100다. 어떻게 된 건지 그놈의 막차가 매일매일 온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막차를 그만 타려 노력해야 한다. 지금의 선택으로 인해 미래의 내가 들여야 할 노력을 가늠해 보아야 한다. 어떤 불꽃도 영원하지 않다. 열정이 사그라질 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자극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벌인 일을 마무리하는 끈기다.



졍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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