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 / 편지에 내 감정을 봉한 뒤에 홀홀 떠내 보내는 것
여는말: 각기 다른 분야에서 멋지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10명의 사람이 모여 매일 101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공유합니다. 10개의 질문마다 한 명씩 질문 하나를 맡아 브런치에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조유진 작가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놀랍게도 밤에 쓴 편지를 아침에 읽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당시의 감정에 충실하게 글자를 나열한 뒤 스티커나 풀로 완벽하게 봉인한다. 편지에 내 감정을 봉한 뒤에 홀홀 떠나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신기하게도 편지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한 번은 편지를 받은 상대가 '왜 이런 말을 했어?'라고 묻길래 도저히 기억나지 않아 '내가 뭐라고 했는데?'라고 대답했던 적이 있다. 나를 떠나간 편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듯이 내 기억 또한 되돌아오진 않는 것 같다. 그냥 기억력이 나쁜 탓이다.
누군가는 손편지를 쓰는 게 어렵다고 하는데 글쎄, 나는 어려웠던 적이 없다. 그냥 앉으면 술술 써졌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 많은지. 저는 지금 배고파요, 오늘은 뭐 드셨어요? 오늘 저는 00에 다녀왔어요. 날씨가 춥더라고요. 이런 말도 곧잘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생각 없이 쓰는 것 같아서 조금 민망하지만 나름 상대와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세세한 결로 촉촉하게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하게 골라 담아 전하는 것이니 잘 봐달라는 메시지를 이번 기회에 슬쩍 전해 본다.
편지의 공간이 충분했던 적은 없다. 써도 써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늘 부족했다. 이런 손편지 스킬을 늘려준 건 중학생 때의 연습 덕분이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편지를 많이 썼다. 줄이 가득한 노트를 찢어 한쪽을 가득 채우는 편지를 써서 친구들과 주고받았다. 그중에는 여자애도 있었고, 남자애도 있었다. 청소 시간이면 쪽지 모양으로 접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킥킥대기도 하고, 때로는 심각해지기도 했다. 글자에 꾹꾹 눌러 담은 마음들은 함께한 시간만큼 차곡차곡 쌓였고 가끔 심심할 때면 종종 꺼내 읽었다. 특히 시험 기간에 읽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지금 읽어보면 그렇게 유치하고 수치스러울 수가 없다. 한참 인터넷 소설이 유행했던 시절이기에 당시의 신조어란 신조어는 어떻게든 적기 위해 노력한 게 티가 났고, 문장마다 옆에 괄호를 넣어 꼭 한 마디를 더 붙였다. 가장 중요한 이모티콘도 편지의 지분율에 한몫했다. 그래서 나는 이 편지에 답장을 뭐라고 썼을까. 상상만 해도 아득해진다. 지금은 편지를 주고받았던 친구들 몇 명을 제외하고 연락이 끊긴 터라 다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내가 준 편지를 불태워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20세 이전에 나로부터 받은 편지는 모조리 전부 다. p는 그런 내게 이게 다 추억이라고 했었지만, 편지 내용을 떠올릴 때마다 느껴지는 수치스러움은 역시 어쩔 수 없다. 이럴 때는 내가 답장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에 감사한다.
최근에는 누구에게 편지를 썼더라. 요즘은 1년에 한두 번쯤은 쓰는 거 같은데. 책을 선물하며 썼던 카드였나 택배를 보내며 같이 넣었던 편지였나. 주절주절 늘어놓다 보니 자주 손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편지를 받는 것도 설레지만 쓰는 일도 무척 두근거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상대에게 어울리는 편지지에 To.00에게는 끄적이는 순간은 언제 생각해도 맘이 들뜬다. 다음 편지는 또 누구에게 쓸까? 행복한 고민으로 글을 맺어본다.
조유진
나를 이해하기 위한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