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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엘리아나 Feb 28. 2023

약사님, 꼭 돌아오셔야 해요!

우리 동네에는 아주 오래된 약국이 하나 있다.

어릴 적부터 다녔던 그 약국은 약이 필요할 때면 으레 가는 그런 곳이었다. 그 약국을 찾는 이유는 오래되고, 가까워서만은 아니었다.

우리 엄마 또래인 약사님은 항상 친절하셨다.

복약 지도는 물론이고, 약에 관련 질문만 해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약을 사지 않아도 부담 없이 들릴 수 있었다. 

또한, 약국에 없는 약을 찾게 되면 그 약이 있을만한 다른 약국을 안내해 주셨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약이 필요할 때에 대부분 문이 열려 있다는 점이다. 어릴 때는 등교 전후에 직장인이 된 후에는 출근할 때와 퇴근길 모두 열려 있었고, 주말에도 닫힌 날보다는 열려있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 한 두 달 전부터 약국이 닫혀있는 걸 더 많이 보게 됐다. 처음에는 약사님의 연세에 거의 매일 장시간 약국을 여는 건 무리여서 시간 조절을 하시는 줄 알았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약국은 아예 열지 않았다.

왠지 엄마는 그 이유를 알고 계실 거 같아서 여쭤보니 바로 대답해 주셨다. 약사님이 최근에 초기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실 줄 알았던 약사님이 치매로 약국을 떠나시다니 큰 충격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며칠 후, 셔터가 내려진 약국에 손글씨로 쓰인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치료를 위해 약국을 잠시 떠납니다.
회복해서 돌아오겠습니다.

약사님이 쓰신 건지 가족이 쓴 건지 모르겠지만 꼭 돌아오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 안내문을 보니 다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평생 약국에만 메여 장기간 여행 한 번 못 가 보셨을 것이고, 좁은 약국에서 하루종일 그리고 주말에도 일을 하셨으니 얼마나 갑갑하셨을지 안타까웠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오만하게 내 잣대로 판단했던 게 아닐까? 어쩌면 그 약사님은 약국에서 일하는 자체가 큰 행복이었을 수도 있다.

아프거나 약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약을 판매하는 것이 직업 이상의 보람이었으며 행복감을 느꼈을 수 있다. 또, 남들이 보기에는 좁은 약국이지만 그곳에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공간이 좁다는 생각을 안 했을 수 있다. 그리고 주말에 일하는 게 집에서 쉬는 것보다 더 좋았을 수도 있고, 여행을 좋아하지 않아서 굳이 긴 여행을 안 가셨을 수도 있다.

나의 상황에 대입해 보니 내가 결혼을 안 해서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나니 겸연쩍었다. 약사님께 큰 실례를 한 것 같다. 조금 오버일 수 있지만 회복해서 돌아오시면 마음속으로라도 사과드리고 싶다. 그러니 안내문처럼 하루빨리 돌아오시면 좋겠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정신도 함께 성장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얄팍한 생각을 했던 걸 보면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나도 공자처럼 쉰이 되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될까?

그런 날이 올 수 있도록 정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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