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다녔던 그 약국은 약이 필요할 때면 으레 가는 그런 곳이었다.그 약국을 찾는 이유는 오래되고, 가까워서만은 아니었다.
우리 엄마 또래인 약사님은 항상 친절하셨다.
복약 지도는 물론이고, 약에 관련 질문만 해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약을 사지 않아도 부담 없이 들릴 수 있었다.
또한, 약국에 없는 약을 찾게 되면 그 약이 있을만한 다른 약국을 안내해 주셨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약이 필요할 때에 대부분 문이 열려 있다는 점이다.어릴 때는 등교 전후에 직장인이 된 후에는 출근할 때와 퇴근길 모두 열려 있었고, 주말에도 닫힌 날보다는 열려있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데 한 두 달 전부터 약국이 닫혀있는 걸 더 많이 보게 됐다.처음에는 약사님의 연세에 거의 매일 장시간 약국을 여는 건 무리여서 시간 조절을 하시는 줄 알았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약국은 아예 열지 않았다.
왠지 엄마는 그 이유를 알고 계실 거 같아서 여쭤보니 바로 대답해 주셨다.약사님이 최근에 초기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실 줄 알았던 약사님이 치매로 약국을 떠나시다니 큰 충격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며칠 후, 셔터가 내려진 약국에 손글씨로 쓰인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치료를 위해 약국을 잠시 떠납니다. 회복해서 돌아오겠습니다.
약사님이 쓰신 건지 가족이 쓴 건지 모르겠지만 꼭 돌아오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그 안내문을 보니 다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평생 약국에만 메여 장기간 여행 한 번 못 가 보셨을 것이고, 좁은 약국에서 하루종일 그리고 주말에도 일을 하셨으니 얼마나 갑갑하셨을지 안타까웠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오만하게 내 잣대로 판단했던 게 아닐까?어쩌면 그 약사님은 약국에서 일하는 자체가 큰 행복이었을 수도 있다.
아프거나 약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약을 판매하는 것이 직업 이상의 보람이었으며 행복감을 느꼈을 수 있다. 또, 남들이 보기에는 좁은 약국이지만 그곳에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공간이 좁다는 생각을 안 했을 수 있다. 그리고 주말에 일하는 게 집에서 쉬는 것보다 더 좋았을 수도 있고, 여행을 좋아하지 않아서 굳이 긴 여행을 안 가셨을 수도 있다.
나의 상황에 대입해 보니 내가 결혼을 안 해서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나니 겸연쩍었다. 약사님께 큰 실례를 한 것 같다. 조금 오버일 수 있지만 회복해서 돌아오시면 마음속으로라도 사과드리고싶다.그러니안내문처럼 하루빨리 돌아오시면 좋겠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정신도 함께 성장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얄팍한 생각을 했던 걸 보면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나도 공자처럼 쉰이 되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