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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엘리아나 Mar 21. 2023

운명이라고 느낀 사람을 만나본 적 있나요?

10여 년 전쯤 결혼 적령기의 나이였을 때 선이 꽤 많이 들어왔었다. 그때 만나본 사람 중 한 사람과 이야기이다.

상대는 나보다 4살 많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주선자인 숙모님의 설명으로는 키가 크고 잘생겼다고 했다. 근데 선 좀 봐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어르신 주선자들의 '잘생김(예쁨)'은 매우 주관적이면서 관대하다는 것을! 그래서 사진이 없는 외모 설명은 스킵해도 무관하다.

나의 경험상 만났을 때의 느낌과 가장 근접한 척도는 만나기 전 주고받는 '연락'이었다. 간단한 본인 소개와 만날 약속을 정하는 짧은 대화 속에 상대방 많은 정보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문자나 카톡으로 시작하는 남자의 첫인사만으로도 대충 느낌이 온다. 몇 번 더 연락이 오가면 그 느낌은 뚜렷해지며 거의 90% 이상 맞다. 특히, 연락할 때 별로라고 느낀 사람을 실제로 만나면 99.99% 그 느낌이 맞.


그는 만나기 전 연락하면서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문자에서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언제 시간이 되는지를 물었다. 다음 날 그는 우리 집과 가까운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다시 연락했다. 그리고 만나기 전 날 확인차 한 번 더 연락했다.

매일 연락하면 부담스럽고 귀찮은데 알아서 안 하니 이런 점도 좋았다. 그에 대한 호감도는 계속 올라갔고, 정점을 찍는 일이 생겼다.

한 밤중에 창문을 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보는 큰 보름달이 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 같이 너무 큰 보름달이어서 놀라고 있는데 아련하게 알람 소리가 들렸다. 

꿈이었다. 깨어났는데도 방금 본 것 같은 생생한 꿈이었다. 심상치 않은 꿈인 것 같아 바로 꿈해몽을 찾아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기혼 여성은 임신하는 꿈이며 미혼 여성은 결혼하는 꿈이라고 했다.

오늘 드디어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구나!

그에 대한 느낌이 90%에서 100%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괜찮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운명일 줄 알았나...

헤어랑 메이크업 좀 예약하고 옷도 샀어야 했는데...

이미 늦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신경 써서 꾸미고 나갔다.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그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로 가는 잠깐 동안 키 크고 잘생겼다는 설명이 진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드디어 운명의 그를 만났다.

우선 외모는 이상형이 아니었지만 선 본 사람 중에 제일 나았다. 그리고 대화를 몇 마디 나눠보니 연락할 때 받은 느낌과 같았다.

'그럴 수밖에... 운명이잖아. 훗.'

그는 말수가 적은 편이라고 했다.

역시 운명이다! 나는 말을 잘하는 편이다. 내가 잘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라 다행이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리드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를 마친 후, 레스토랑을 나오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둘 다 예상 못한 비라 우산이 없었는데 그가 근처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 왔다. 우산을 같이 쓰니 밀착하게 되었고 그렇게 카페까지 함께 걸었다.

운명의 만남이라 그런지 이런 이벤트도 있고 확실히 특별한 날이다. 카페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내가 주도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커피가 함께 나의 이야깃거리도 떨어지면서 퇴사한 옛 동료까지 등장하고 나서야 첫 만남은 마무리 됐다.


첫 만남에 이 정도 채워주는 모습을 보였으니 성공적이다.

집에 오는 길에는 다음 데이트 때 무슨 이야기를 할지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을 했다. 집에 도착하자 그에게 문자가 왔다. 나는 바로 답문을 했고, 그가 나의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며칠이 지나서였다.

그날 이후 그는 연락이 없었다. 많이 바쁜 게 아닐까 싶어 먼저 문자를 보내봤는데 형식적인 답장이 왔다.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나의 느낌과 운명론에 사로잡혀서 정작 제일 중요한 그의 사인을 놓치고 있던 것이다.

만남을 되짚어 보니 내가 마음에 들었다면 말을 더 하려는 노력을 했을 텐데 그는 전혀 그러지 않았고, 중간중간 지루해했것도 같다.

나의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잘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알게 됐다. 말 수가 적은 그를 위해 많은 말을 했던 나의 노력은 그를 채워준 게 아니었다. 오히려 혼자 신나게 수다 떠는 피곤한 여자로 느껴졌을  있다.

내가 그의 적은 말 수를 채워주려는 노력 대신 그의 보조에 맞추며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게 해 줬다면 어땠을까?

 혼자만의 아쉬움일 뿐 그렇게 했어도 그와 나는 이어지지 않았을 듯싶다. 


왜 하필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난 날 그런 꿈을 꿨으며 갑자기 비가 오는 우연까지 겹쳐서 운명론자가 됐는지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큰 보름달 꿈의 해몽이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내가 바라는 해몽을 선택했었던 것 같다. 또한, 일기예보에 없었는데 비가 오는 날은 흔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났다면 지나쳤을 일상들을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서 의미부여를 하며 연관 지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남녀 간의 운명론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근데 또 모르겠다. 좋은 짝을 만나게 된다면 다시 운명론자가 될지도. 

운명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사람 만난 이야기는 여기서 끝. 진짜 운명을 만나게 된다면 다시 이어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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