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기억도 희미해진 입사 초기 때 일이었다.
신입 교육이 끝난 금요일 저녁 회식을 했다.
술자리인 만큼 회사에서는 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즐거운 마무리를 하였다.
그리고 월요일 오전 마주친 임원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는데 회식 때 나온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우리 동기 중 누군가가 얘기한 것이다. 놀랍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했다. 누굴지 감도 안 잡혔다.
입사한 지 한 달도 안된 동기 중 스파이가 있다니...
아직까지 누군지 모르지만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다.
긴 시간 동안 회사를 다녀보니 스파이는 놀라운 일이 아닌 흔한 일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임원진들은 직원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아서 직원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
팀장이나 본부장에게 보고를 받기는 하지만 내용이 한정적이며 다른 사람의 시선도 궁금하다.
또, 업무 외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고 싶다.
그래서 스파이를 만든다.
스파이는 말 그대로 스파이기 때문에 비밀리에 그 역할을 한다. 하지만 모두 그러는 건 아니다. 대놓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척하지만 티가 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절대 안 그럴 거 같은 사람이 스파이인 경우도 있다. 또, 본인이 스파이라는 걸 모르지만 그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곳에나 스파이는 있고 누구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스파이도 누군지 모르는데 최종 보고라인도 누구인지 모르고 몇 명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내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에는 말과 행동을 항상 주의해야 한다. 여기까지 읽고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내가 일하는 것도 힘들고, 상사한테 깨지는 것도 힘든데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해?'라는 생각 말이다. 맞는 말이다. 스파이에 너무 큰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단, 언제 어디서든지 스파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럼 어떤 내용이 보고될까? 업무 관련은 당연하고 시시콜콜한 나의 사생활까지 보고될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이 될 것이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스파이를 너무 의식하지 말고 내 갈길 알아서 가면 된다. 아니, 내 길길 알아서 갈 거면 스파이 무시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저 문장의 핵심은 스파이를 의식하지 말라가 아닌 '너무'가 핵심이다. 회사생활에서의 기본적인 것들만 해내도 별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기본적인 것들이란 업무 능력과 태도, 인간관계, 문란하지 않은 사생활 등이다.
각 요소들이 평균치 정도만 유지하면 된다.
회사생활을 무난하게 하고 있는 사람은 스파이나 보고 받는 사람 모두에게 흥미로운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기본을 안 지키면 그때부터 스파이의 집중 관찰 대상이 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때 억울한 경우가 생길 수가 있다. 바로 스파이와 관찰자의 관계가 안 좋아서 관찰자를 악의적으로 보고하는 경우이다. 스파이의 보고를 받는 사람은 스파이의 말을 신뢰한다. 스파이를 정할 때 긴 시간 지켜보고,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사람이니 당연하다.
그래서 여기에 회사생활의 기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이 더해진다. 바로 사내 인간관계이다. 사내에서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적이 스파이가 될 수도 있고, 스파이가 아니더라도 회사생활의 방해 요소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순 없더라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불편하지 않다는 건 친절하고 착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내 업무에 충실하고,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다.
뜻하지 않게 내가 스파이가 누군지 알아챌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람만 조심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스파이는 몇 명이라고 정해진 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파이를 알았을 때 나만 관찰되는 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누군가 나쁜 행동을 했을 때 그 내용을 흘리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보고하기는 어렵지만 그 행동으로 인해 피해가 있을 때 그 사실을 사내 공익 목적으로 발설하는 것이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없는 사실을 추가하거나 지나친 과장을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비방하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듯한 어감도 자제하고 팩트만 전달해야 한다. 그래야 그 말에 신뢰가 생긴다.
어떻게 보면 사내 스파이는 암행어사와 비슷한 역할도 있을 것이다. 보고되는 이야기들 중에 좋은 이야기도 분명히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역할의 비중은 아주 작을 것 같다. 스파이가 굳이 다른 사람을 본인보다 돋보이게 하고 싶지 않고, 보고받는 사람도 숨은 뒷 이야기를 알고 싶어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