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가해자가 아닌 내게 베푸는 것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 Fighter (2002)

by 이지오

『영혼의 자리』를 쓴 게리 주커브는 말했다.

힘이 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아무리 외적인 힘을 단련해도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일까? 세상엔 나보다 힘 있는 자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조금이라도 더 큰 힘을 얻고자 부자, 성공한 사업가, 인플루언서가 되려 한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설사 그들이 된다 해도 보이스피싱 사기나 뜻밖의 재난, 해코지성 가짜뉴스 한 방에 곧장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외적인 힘은 다분히 유동적·가변적·일시적이다.




그래 넌 날 속이고 바람피우고 별짓 다했지

넌 내가 분해서 잠도 잘 거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넌 틀렸어

왜냐면 네가 한 짓들이 아니었으면


난 지금도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깨닫지 못했을 테니까


분하긴커녕 감사해

덕분에 난 더 강한 사람이 되었고


열정으로 가득하고

전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되었어


넌 날 전사(fighter)로 만들어 줬어

네 덕에 난 세상을 빠르게 간파했고


맷집도 좋아졌고

똑똑하게 처신하는 법을 배웠어


고마워, 날 전사로 만들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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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나인틴 나인티 나인, 뉴 밀레니엄을 목전에 둔 팝 시장에 두 10대 소녀가 등장한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브리트니 스피어스. 먼저 빌보드 Hot 100 정상을 차지한 건 브리트니였지만, 크리스티나의 <Genie in a Bottle>은 브리트니의 <...Baby One More Time>보다 무려 3주간이나 더 정상 자리를 지킨다.

이제 초미의 관심사는 그래미로 쏠렸다. 꼰대로 유명한 그래미가 과연 틴팝 가수에게 신인상을 줄 것인가? 준다면 누구에게?

일단 판은 흥미롭게 깔렸다. 크리스티나와 브리트니 모두 후보에 오른 것이다. 시상자로 나선 멜리사 에더리지와 사라 맥라클란, 셰릴 크로의 입을 통해 불린 이름은 바로……………………크리스티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크리스티나는 4집 앨범 《Stripped》를 발매한다. 타이틀곡 <Fighter>는 크리스티나의 새 정체성을 공표하는 사자후다. 이제 더 이상 핫가이와 사랑에 빠지는 소녀가 아니라, 나 자신과 사랑에 빠진 전사로서의 선언이었다.




용서란, 자신을 짓밟은 구둣발에서 풍기는 꽃향기와 같다.


- 마크 트웨인



나는 이 말을 처음 듣고 모종의 반감이 들었다. 꽃은 무자비한 인간의 구둣발에 짓이겨졌는데도 복수는커녕 향기나 계속 풍겨야 하다니, 전형적인 ‘피해자다움’의 강요 아닌가? 그런데 <제랄드의 게임>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저 말을 잘못 이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주인공 제시는, 사정을 다 말하자면 복잡하지만, 아무튼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중년 여성이다. 양손에는 각각 수갑이 하나씩 채워져 양팔을 벌린 상태로 커다란 침대에 묶여 있다.

그녀는 혼자다. 게다가 지금 이곳은 외딴 호숫가 별장 안이다. 누군가가 와서 수갑을 풀어주길 기대하는 것보다 천장이라도 무너져 빨리 죽길 기도하는 게 나아 보였다.

자포자기에 빠진 제시. 갑자기 어릴 적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제시는 12살 때 가족과 별장에 놀러 갔다. 잠시 어머니가 외출한 사이 아버지는 제시에게 공원 벤치에서 함께 일식 구경을 하자고 제안한다. 제시는 좋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아버지가 작고 귀엽기만 하던 딸이 어느 새 훌쩍 커버린 것 같아 서운하다며 예전처럼 다시 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제시는 망설였다. 하지만 아버지를 실망시킬 순 없었다. 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 망원경으로 일식을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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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갑자기 등 뒤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아버지가 자위를 하고 있던 것이다.

아버지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만일 네가 발설하면 어머닌 충격을 받아 쓰러질 거고, 그럼 결국 엄마 아빤 이혼하고 가정은 파탄날 거라고 했다. 바로 너 때문에. 결국 제시는 그 일에 대해 평생 함구한다.

다시 현재. 수갑에 묶인 채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제시는 환영 속에서 어린 자신을 만났다. 어린 제시는 홀로 침대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현재의)제시가 말했다.

“미안해.”


그러나 어린 제시가 원한 건 사과가 아니었다. 잘못도 없는 나한테 스스로가 사과한다는 건 무의미한 자책일 뿐이었다. 그녀가 현재의 제시에게 원한 건 오직 ‘지금 이 순간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이제 제시는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 뒤 기지를 발휘하여 극적으로 수갑에서 탈출했다.

이것이 영화에서 말하는 용서였다. 구둣발에 짓이겨져도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도 아니고, 강자의 희생양이 된 바보 같은 나를 자책하는 것도 아니었다.

진정한 용서란, 다른 사람이 내게 무슨 짓을 저질렀더라도 나는 계속 본연의 나를 잃지 않고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꽃이라면 꽃향기를 뿜는 것이지, 발에 밟혔다고 해서 피나 고름 냄새를 풍길 필요는 없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를 짓밟은 대상에게 외려 감사하게 된다. 세상은 만만찮은 곳이란 걸 알려주고 고통과 상처를 통해 더 강해지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난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게 된다.

‘내가 승자가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용서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늘 고약하게 대했다. 그리고 군인인 아버지 때문에 자주 전학을 다녀야 했다. 특히 일본에서 살 땐 말 그대로 에일리언(‘외국인’이란 뜻과 함께 ‘외계인’이란 뜻도 있다.) 취급을 받았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짠 태피스트리와 같았다. 하지만 결국 그게 그녀의 음악이 가진 힘이 되었다.


그녀는 말한다.

“트라우마는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그것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저는 음악을 통해 그걸 이룬 뒤 제 과거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 크리스티나는 그래미 신인상 수상 당시 감사한 분 명단에서 아버지를 빼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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