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 영웅을 발견하라

머라이어 캐리 - Hero (1993)

by 이지오

눈을 감아보자. 그리고 한여름 풍경을 떠올려보자.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가? 작열하는 태양과 아스팔트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실제 한여름에 사람들의 머릿속 풍경은 이와는 정반대다. 거기엔 안나푸르나 봉처럼 수북이 얼음이 쌓인 빙수와 콜라병을 들고 있는 북극곰, 엘사와 올라프가 들어있다.


“나는 실제 병에 걸렸을 때보다 건강했을 때 질병을 훨씬 더 두려워했다”는 몽테뉴의 말처럼, 인간의 마음은 눈앞의 현실과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가진 게 많을수록 더 큰 불안에 빠진다. 지갑에 1,000원을 넣고 길을 다닐 때와 1,000만 원을 넣고 다닐 때 중 어느 쪽이 더 불안한가?

반대로, 최악의 상황이야말로 내 안에서 잠든 영웅이 깨어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더이상 잃을 게 없을 때 우린 상실의 불안감으로부터 해방된다. 온갖 참신한 아이디어가 잠재력의 수조를 가득 채운다. 내면의 의지는 담대해지고, 남들이 몸 사릴 때 이판사판식으로 부딪힌다. 바야흐로 위대한 영웅의 출현이다.




당신의 가슴 속에는

영웅이 살고 있어요


내가 무력하게 느껴진다 해도

두려워할 것 없어요


당신의 영혼 깊숙한 곳에

해답이 숨어있으니까요


그 답을 찾았을 때

모든 슬픔은 사라질 거랍니다


그리고 거대한 영웅이 등장할 거예요

그 영웅은 모든 두려움을 없애줄 거고


당신은 결국 이겨낼 거예요

그러니 희망을 잃었을 때면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세요

그러면 알게 될 거예요


그곳에 영웅이 살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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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머라이어 캐리의 데뷔 앨범 《Mariah Carey》는 전 세계적으로 1,500만 장 이상 팔렸다. 그중 무려 4곡이나 빌보드 Hot 100 정상을 차지했다. 평론가들로부터 클래식이란 찬사도 받았다.

하지만 이듬해 나온 2집 앨범 《Emotions》는 화려한 보컬 묘기 쇼에 그쳤다는 평을 듣고 만다. “나 이만큼 노래 잘해”라고 뽐내기 위한 앨범이란 거다. 상업적 성과도 전작에 비하면 아쉬웠다.


이제 그녀에겐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그래서 동료 가수인 글로리아 에스테판이 부를 걸 염두에 두고 곡 하나를 썼다. 그게 <Hero>다. 그러니까 <Hero>는 애초부터 머라이어가 나답지 않게 만들기로 작정한 노래였다.

하지만 당시 소니 뮤직 CEO이자 머라이어의 약혼자였던 토미 모톨라는 <Hero>를 듣자마자 대박을 예감했다. 소니 뮤직은 머라이어가 소속된 컬럼비아 레코드의 모기업母企業이었다. 그는 “무조건 당신이 이 노랠 불러야 한다”며 머라이어를 압박했다. 결국 그녀는 <Hero>를 자신의 3집 《Music Box》에 싣는다.(다행히 글로리아는 이때까지 머라이어가 자신을 위해 곡을 썼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Hero>는 발매와 동시에 빌보드 Hot 100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4주간이나 자릴 지켰다. 하지만 여전히 ‘내 스타일은 아닌데…’하며 찜찜해하던 찰나, 머라이어에겐 뜻밖의 일이 발생한다.

전 세계 팬들로부터 전에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편지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평생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까지 결심했는데, <Hero>를 듣고 다시 한 번 살아볼 용기를 냈다’는 식의 사연들이 쏟아졌다.

그때부터 그녀는 <Hero>에 대한 일부 ‘신파다’ ‘유치하고 감상적이다’ 등의 혹평을 일절 무시하기로 한다. 자신의 노래를 듣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낸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흔히 영웅은 분신쇄골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발견된다. 혹은 플라톤적으로 설명하면, 그것은 상기된다.


영웅성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나의 영혼 깊숙이 에칭etching돼 있다. 하지만 엄마의 자궁 안에 들어올 때 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그 본성을 잊고 만 것이다. 출생 후엔 육체를 통해 피로라는 감각을 배운다. 피로감에 찌든 인간은 평안平安을 사들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때론 사기도 치고 범죄도 저지른다. 그 과정에서 내 안의 영웅성은 깊이 잠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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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은 삶에 위기라는 자명종을 울림으로써 내 안의 영웅을 흔들어 깨운다. 그러면 마치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했을 때 어릴 적 기억의 편린들이 머리를 스치는 것처럼 레테의 물안개 너머로 잊고 있었던 영웅의 형상이 드러난다. 이윽고 ‘최악의 상황’이라는 망치가 평안의 껍질을 내리치면 내 안의 영웅은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다. 이른바 아남네시스anamnesis(회상, 기억해냄)다. 망각된 영웅성英雄性과 재회하는 순간이다.


당신 안에는 영웅이 살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의 영웅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를 깨워야 한다. 그래서 그 영웅이 나를 구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고, 내가 사는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건 당신이 먼 훗날 어떠한 경지에 올랐을 때 비로소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오직 그것을 ‘기억해냄(아남네시스)’으로써 말이다.


지금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는가? 그렇다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다. 당신 안의 영웅을 깨울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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