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리 홉킨 - Goodbye (1969)
사람들은 혼자가 되는 걸 두려워한다. 혼자가 되면 외로움이라는 부상負傷을 입는다. 그래서 목발을 찾아다닌다. 타인이라는 목발을. 그리고 대부분 그것을 로맨틱한 관계에서 찾는다. 그래서인지 평소 주체적으로 보이던 사람도 유독 연인 앞에서는 놀랍도록 의존적으로 변하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알고 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다리가 부러지길 내심 바란다는 걸. 그때 내가 목발을 자처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상대는 내게 의존한다. 의존 대상이 된다는 건 상대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함을 의미한다. 나를 의지하는 사람 곁을 내가 떠나면 상대는 넘어지게 돼 있다. 이를 이용해 “헤어져”란 말로 협박하기만 해도 상대는 패닉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내가 어릴 땐 백화점이 지금보다 훨씬 더 성행했다. 지금처럼 대형마트가 많지 않던 시절, 특히 주말이면 백화점은 쇼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지하 4, 5층까지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이 페도라를 쓴 누나들의 안내를 받으며 주차 공간을 찾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백화점은 저녁 9시경 문을 닫았다. 8시 40분부터 스피커에선 “굿바이~ 굿바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갔다.
“여보, 빨리 좀 사!”
“자기야, 그게 젤 예쁘다니깐!”
“아니 왜 벌써부터 나가라고 난리래.”
그때 사람들을 재촉하던 노래가 바로 매리 홉킨의 <Goodbye>다.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의 웨일스 가수 홉킨은 영국 슈퍼모델 트위기의 추천으로 애플 음반사와 계약했다. 애플은 비틀즈가 설립한 회사인데, 아이폰의 애플과는 관련이 없다.(물론 나중에 필연적으로 상표권 분쟁이 일어났다.)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가 쓴 <Goodbye> 가사 내용은 단순하다. 지금의 연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멀리서 자신을 애타게 찾는 사람 곁으로 떠나겠다는 것이다. 일견 환승연애 같지만, 멀리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주인공의 자아로 해석할 여지는 없을까? 지금껏 연인에게 양도했던 자아를 이제는 그것의 참주인인 내가 되찾겠다는 의지의 목소리로 말이다.
홀로 서는 걸 두려워하면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나의 팔다리에는 보이지 않는 끈들이 연결된다. 그걸로 상대는 나를 인형처럼 조종하려들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꼭 사악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는 정말로 나를 아끼고 사랑할지도 모른다. 다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걸 상대에게도 강요하는 게 그가 아는 유일한 사랑법일 뿐.
영화 <흔적 없는 삶>의 주인공 윌은 참전 용사이자 사춘기 딸 톰을 혼자 키우는 싱글 대디이다. 그는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그에게 세상은 여전히 전쟁터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딸을 지킬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톰을 데리고 국립공원 숲에 들어가 산다. 물론 불법이다. 톰은 어릴 적부터 늘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특별히 불만은 없다. 아버지만 옆에 있으면 모든 게 괜찮았다.
그러던 어느 날 경비에게 적발된 부녀는 사회복지 기관으로 인도되었다. 그리고 지정된 임대주택에서 살아야 했다. 톰은 의무적으로 학교에 나가야 했다.
윌은 불안해졌다. 그에게 바깥세상은 위험을 뜻했기 때문이다. 반면 톰은 새로운 삶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웃에 사는 또래 소년과도 친구가 되었다. 소년은 항상 나무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었다. 톰이 그게 뭐냐고 묻자, 나중에 자기가 독립해서 살 집이란다.
순간 톰은 깨달았다. 이제껏 자신은 아버지라는 목발을 짚고 살아왔다는 걸. 자신의 두 다리는 멀쩡한데도 말이다.
사랑은 목발이 아닌 구름판(springboard)이 되어야만 한다. 목발이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한다면, 구름판은 도약의 순간에만 잠깐 도움을 줄 뿐이다. 목발은 상대가 자기 쪽으로 기대길 바라지만, 구름판은 자기 위로 넘어가도록 허용한다. 목발은 “나 없으니까 힘들지?”라고 말하지만, 구름판은 “잘 가”라고 인사한다. 우린 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가”라고 인사해야 할까?
나는 모든 사람 앞에는 평생 수영해야 할 레인[lane]이 하나씩 뻗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 생겨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레인은 오롯이 나 혼자서 수영해 나가야 한다.
멀리서 본 레인은 미세하게 휘어져 있다. 궁극적으론 거대한 원을 형성하고 있다. 마지막엔 모든 사람이 결국 출발 지점으로 돌아온다. 돌아왔을 때 나의 모습은 출발했을 때와 사뭇 다를 것이다. 시인 하지장이 “젊어서 고향 떠나 돌아와 보니 고향 사투리는 그대론데 내 머리만 희었구나”라고 노래했듯이, 그동안 우린 물살을 헤치느라 지쳤고 늙었고 상처 입었다.
그럼에도 레인을 완주할 수 있었던 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옆 레인 사람들 덕이었다. 그들은 내 레인을 함부로 침범하거나 나를 본인 레인으로 끌고 가 자신의 수영법을 강요하지 않았다. 『별주부전』의 자라처럼 나를 등에 업고 대신 헤엄쳐주지도 않았다.
그저 각자의 레인을 지켜 가면서 “힘들지? 나도 힘들어. 그래도 어쩌겠어, 가야지”라고 건넨 한두 마디가 매 순간 나를 몇 미터 더 전진시켰을 뿐이다.
우리의 사랑은 이래야 한다. 어쩌다가 타인과 사랑에 빠진다 해도, 그래도 여전히 내 갈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상대도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땐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러다가 고비를 넘기면 다시 그 손을 놓아야 한다.(물론 여기서 손을 놓는다 함은 육체적 결별이 아닌 정신적 독립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사해야한다. “굿바이”라고.
이것은 한편으론 힘든 일이다. 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되면 우린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기억하자. 신이 허락한 레인 하나당 수용 가능 인원은 오직 하나다. 그것이 신이 말하는 사랑이다. 그것이 릴케가 이렇게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며, 다른 모든 행위는 그 준비과정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필요한 걸 제공하는 건 분명 숭고한 행위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는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홀로 서도록 놓아주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내겐 그 어떤 타이틀도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를 사랑하고 성장시키고 위기에 처했을 때 도왔더라도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 노동과 다른 점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이유이다.
어떤 사람은 이웃을 만나 자기 자신을 찾고, 어떤 사람은 이웃을 만나 자신을 잃는다. 당신은 자신에 대한 잘못된 사랑으로 고독을 감옥으로 만들고 있다.
-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