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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Dec 07. 2021

내 마음과 내 뜻대로 자라지 않지만

딸아이의 성조숙증

쌍둥이를 품고 33주를 막 지났을 때 나는 내 배가 한계에 부딪혔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미 배는 자주 뭉치고 돌처럼 딱딱했고, 끝없이 늘어난 배가 더 이상 커질 수 없다는 것을 하루하루 느끼던 찰나였다. 


37주가 지난 늦은 밤, 펑- 양수가 터진 소리가 들렸고, 물과 함께 묽은 피가 비쳤다. 

덜덜덜 떨며 응급실 침대에 누워 얕게 오는 진통을 느끼고 있었다. 담당의가 오려면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고, 점점 커지는 진통에 겁이 덜컥 났다. 1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수술 의사를 밝히니, 수 간호사가 한마디 했다. 


"엄마가 돼서는 그것도 못 참아요"

엄마라고 다 참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고, 수술대 위에 누웠다.  


2014년 12월 10일. 

새벽에 둥이들이 세상에 나왔고, 수술직 후 호흡곤란이 온 나는 긴 시간 인공호흡기를 끼고 그 새벽을 남편과 함께 보냈다. 마치과 의사는 깨어나지 않는 내 옆에서 초조함과 답답함으로 애꿎은 벽을 주먹으로 치며 혹여나 자신의 마취가 잘못된 건 아닌가 되짚고 되짚었을 터였다. 나는 날이 밝고서야 깨어났고, 인형처럼 작은 내 아이를 그제야 안았다. 이르게 태어나서 인큐에 들어가지 않은 둥이들이 대견했는데, 퇴원 날 딸아이의 심장에서 잡음이 들린다는 의사의 소견서를 들고 그렇게 처음으로 대학병원을 찾았었다. 


1년 뒤, 다시 찾은 대학병원에서 더 이상의 잡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결과를 받고서도 소아과에서 청진을 할 때마다 심장이 뛰었었다. 


아들에 비해 딸은 유독 지름길을 놔두고 장애물이 많은 길을 에둘러 돌아 돌아가는 기분이 들어 힘에 겨웠다. 





딸은 모든 면에서 더디 컸다. 키도 몸무게도. 작아서 늘 제 나이보다는 어리게 봤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봄과 여름을 보내고서야 앞자리 숫자가 '2'로 바뀌었다. 약하게 태어난 탓에 한약을 두어 번 지어먹고, 성장 비타민을 꾸준히 먹고 모두의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가을이 지나가고 있을 무렵, 딸아이의 가슴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몽우리가 잡히고 마른 몸에서 야트막히 솟아 있는 게 걱정이 되어 태어나 세 번째 대학병원을 예약하고 검사를 받았고 결과를 들었던 오늘- 겨울이 성큼 왔고, 둥이들의 생일이 4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1년 9개월이나 빠르네요. 성조숙증이 의심되니 정밀검사를 받아야 해요. 현재 나이는 6년 11개월인데, 빠르죠? 나이와 같이 가면 좋은데 너무 빨라서, 이렇게 가면 키가 150도 안 클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말라는 친정엄마의 말을 붙들고 덤덤히 진료실로 들어가서는 의사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말할 수 없는 억울함이 올라왔다. 단정하고 곱상한 얼굴로 설명하는 교수의 가냘픈 팔뚝을 흔들며 이게 말이 되냐고 하소연을 늘어놓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키는 또래보다도 작은데, 키와는 상관없는 건가요? 이유가 뭔가요? 저희 어릴 땐 이런 거 없이도 잘 컸잖아요?..... 정말 억울해요" 


"키와는 상관없어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성장판이고, 성장판 나이예요. 이전과 달라진 환경 탓도 있어요. 환경호르몬, 이를 테면 요즘 아이들은 슬라임 같은 것도 많이 가지고 노니까요. 어머니 때에도 소아관 있었잖아요? 플라스틱, 환경 호르몬 등 노출로 인한 성조숙증 아이들이 많아진 건 사실이에요. 아이가 키도 작고 생일도 느리니 억울한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이의 몸에 평균 이상의 센 무언가 들어와서 몸의 변화가 있었을 거예요." 


"철분이 부족하니 고기 많이 먹이고, 고기 잘 안 먹죠? 나머지 모두 정상이니, 성장 비타민 먹이지 마시고 많이 뛰어놀 수 있게 해 주세요. 줄넘기 같은 거. 줄넘기 하나요? 아직 잘 못할 나이죠?"


성조숙증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내 아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확신했었다. 정말 더디 컸으니까. 키와는 상관없다- 는 의사의 말을 나는 여전히 반박하고 싶다. 




발육을 포함한 언어와 학습인지는 또래보다 1년이 넘게 느리고, 성조숙은 제 몸보다 1년이 넘게 빠른 딸아이.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는. 아이를 키운다는 건 그런 거였다.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절대로 자라지 않았다. 나는 딸을 보며 근심을 풍기고 아들을 보며 안도했다. 아들을 보면 자꾸 웃어지고 딸은 보면 걱정이 앞섰다. 누구보다 딸이 내 마음을 먼저 알았을 터. 


처음 딸을 안고 대학병원을 찾았을 땐, 눈이 그친 뒤 하얀 얼음이 길 끄트머리에서 냉기를 풍기는 추운 날이었다. 찬 바람이 들어갈까 싶어 꽁꽁 싸맨 갓난아이를 대학 병원 차가운 기계 위에 기저귀만 남긴 채 모든 옷을 벗겼을 때, 딸아이는 사지를 흔들며 빨갛게 울었었다. 나는 그저 남편과 닮은 아이를 갖고 싶었지, 거기에 이런 장면까지 포함되어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도 못했다. 커다란 기계 위에 점처럼 작은 아이가 누워 빨갛게 우는 모습은 뇌리에 박힌 작은 충격이었다. 그런 딸이 뽀얗고 하얀 살이 투명하게 올라 토실토실 건강하게 크는 것을 나는 내내 상상했었다. 


나는 딸의 '느림'을 넉넉하게 지긋하게 느긋하고 다정하게 기다려주는 엄마가 아니었다. 나긋하다가도 버럭 거리며 '모름'을 크게 나무랐다. 똑같은 것을 인내하며 설명하다가도 끝내는 "생각 좀 해. 생각" 비난했다. 그러면 딸은 그렁히 차오른 눈물은 줄줄 쏟으며 "네"라고 했다. "공부를 못해서 죄송해요"라고도 한 날, 나는 어떤 '엄마'인 지 생각했다. 좋은 엄마는 될 수 없더라도, 나쁜 엄마는 되지 말아야지. 무서웠고, 자신이 없었다. 


하교를 한 딸아이를 집에 두고 결과를 들으러 병원으로 향하는 나를 향해 딸이 "엄마 잘 갔다 와. 나 생각하고 있을게" 감정이 뒤로 밀려나고 이성이 급하게 움직였다. 늘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딸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질 못했다. 분명한 건, 아이 탓이 아니었는데도 아이는 나의 태도와 말을 들으며 자신의 '잘못'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그 옛날 나처럼)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는 평균에서 밀려나거나 미치지 못하면 아이가 느낄 만한 행동을 하며 불안을 심어주고 있었다. 


아이의 가슴에서 몽우리가 만져졌을 때부터 따라붙던 한숨을 잘라 버리기로 한다. 

아이에게 더 이상 내 '걱정'을 들키지 않고, 자신이 또 무언가를 '잘못'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줄넘기를 챙겨 아이들과 밖으로 나왔다. 아들은 X자 뛰기를 하는데, 딸은 이제야 겨우 한 번을 넘는다. 

대단하다고 손뼉을 쳐주고 나니, 신이 났다. 두 번을 넘어 보라는 권유를 대차게 받고는 해가 저물 때까지 웃고 팔을 돌린다. 


발레를 끊고, 태권도를 보낼까. 

매일 나와서 줄넘기를 해봐야지. 

좋은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을 거야. 

서쪽으로 태양이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데, 딸아이가 달려온다. 


엄마 엄마 엄마

완벽하게 벅차면서도 완벽히 슬픈 단어. 엄마, 하며 달려오는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의 웃음을 지켜야지. 저 웃음 뒤에 마냥 아프기만 한 슬픔이 어리지 않도록 건강한 웃음이 더 많이 새겨지도록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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