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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Dec 13. 2021

엄마는 '요구르트 아줌마'였다.

그 시절, 촌지 대신 요구르트

며칠 전 집에 놀러 온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자연스럽게 '촌지' 이야기가 나왔다. 

"당신은 엄마가 촌지를 찔러줘서 사랑받았지? 나쁜 놈"(남편은 내 남편인 이유로 가끔 이유 없는 샌드백이 된다.) 맞은편에 앉은 친구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 땐 정말 그랬지" 

엄마의 치맛바람이 장난 아니었다는 아이들은 늘 반장과 부반장을 도맡아 했고, 대체적으로 공부도 잘했다. 촌지를 찔러 준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그 시절 선생님에 대해 별다른 나쁜 기억이 없다는 데에 통상적인 공통점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 반장 안 해본 사람도 있어?" 전에는 '함구' 했다면, 이제는 당당히 말한다. 

여기 있잖아, 네 앞에.






엄마는 '요구르트 아줌마'였다. 

엄마는 늘 손주들이 있는 우리 집에 올 때면 요구르트를 잔뜩 사 왔다.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면 냉장고 그득하게 요구르트를 채워 놓았다. 손바닥 만 한 요구르트가 아닌 큼지막한 요구르트를 사다 놓고는 "거기 요구르트 좀 먹어"라고 했는데- 나에게 했든 아이들에게 했든 나는 늘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아파트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요구르트 아줌마'를 발견하면 요구르트 10개를 사기도 했고, 유산균이 든 고급 요구르트를 몇 천 원을  더 얹어 사기도 했다. 가방을 둘러메고 걷지 않아도 되는 현재의 요구르트 아줌마에게 나는 늘 어린 시절의 냄새를 맡고는 했다. 작은 요구르트를 손에 들고 뒤 꽁지를 이로 뜯어 쪽쪽 빨아먹는 곱슬머리 동생도 불러왔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엄마가 무슨 연유로 요구르트가 잔뜩 든 가방을 메고 느닷없이 교실에서 친구라 불린 애들에게 요구르트를 나눠주고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고개를 들었는데 비에 젖은 엄마가 눈앞에 있었을 뿐이었다. 놀라운 경험들을 많이 한 탓도 있지만 갑작스러운 엄마의 등장에도 호들갑을 떨지 않은 것은 좋고, 싫음을 포함한 걸러내지 않은 마음과 생각을 표출하는 자연스러운 방법과 행동을 물려받지 못해서였다. 

무슨 상황이든지 간에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마음껏 표현하고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미움받지 않으리라는 자신감, 설사 미움을 받더라도 표현하는 용기, 시시콜콜한 잡음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굵직한 신념과 믿음이 '자존감'이라 통용되는- 이것이 살면서 굉장히 중요한 일임을 깨달았다. 어릴 때부터 '사랑과 존중'을 받고 자란 사람은 '실패와 용기'에 탁월한 면모를 보였고, 눈동자의 빛깔과 냄새부터 달랐다. 나는 이 모든 면에서 '실패'한 사람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젖은 가방에서 연신 작은 요구르트를 꺼내는 엄마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엄마가 '요구르트 아줌마' 였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엄마의 '처지'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내 '처지'임을 알았다.


나는 학교에서 그저 우두커니 앉아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눈에 띄지 않는 존재. 빈 집의 문을 닫고 나와 고만 고만한 또래들이 붐비는 교실에서도 나는 그 나이가 갖는 특유의 발랄함, 생기에 섞이지 못하고 외따로 있었다. 국민학교 선생님들은 유독 나를 예뻐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 해서 유독 나를 예뻐해야 할 '명목'도 없지만,  아침마다 같은 얼굴로 등교를 해 교실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어린 학생이 느낄만한 무관심은 마음이 먼저 알았을 테다. 그 느낌은 그 시절의 나를 더 초라한 나로 기억케 했다.  공기와 분위기에서 전해져 종국엔 모든 감각들로 들어와 마음으로 닿는, 그렇게 알아지는 것들이 있었다.

수두가 올라온 얼굴에 하얀 약을 바르고 등교를 했을 때에도, 반 아이들과 선생님과 함께 한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고 싶어서 슬쩍 손가락을 바꿨을 때에도 친구들의 차가운 수군거림과 선생님의 야유를 따라 말하는 마흔 명 친구들에게서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나는 그것이 '가난'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은 성인이 되고서야 들었다. '바보'라고 말하는 선생님의 웃는 얼굴의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떠오를 때면 나는 선생님의 인성을 함께 의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생님이 얻은 건 무엇이었을까. 촌지를 받지 못한 소심한 선생님의 복수였을까. 나를 제외시킨 친구들과의 심심한 장난이었을까. 전자든 후자든 상처로 남은 건 달라질 수 없는 사실이었다.    


'촌지'가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에게 남몰래 찔러 넣어 줄 푼돈이 없었을 엄마가 그 시절 소리 소문 없는 의례적인 절차를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어 그 비를 맞으며 학교로 찾아와 선생님을 비롯한 아이들에게 요구르트를 돌리며 우리 딸 좀 잘 봐달라고, 했을까. 6년 동안 '요구르트' 말고는 촌지 한 번을 준 적이 없어 선생님들의 사랑은 늘 나를 비껴갔다. 국민학생치곤 너무 우울해 보여, 기피대상이었나 아니면 공부를 곧 잘하는 우등생이 아니라서?! 도리어 촌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우습게도 마음이 덜 아팠다. 그 시절, 모든 선생님이 그랬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듯이 선생님도 선택할 수 없었던 일이라 받아들인다. 공평한 눈길로 학생을 바라보고 결핍이 보이는 아이들을 향해 손을 내미는 교사를 한 번쯤은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저 내 외로운 어린 시절을 더 외롭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2015년 '김영란법'이 제정된 이후로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등에서는 공식적으로 학부모가 주는 그 어떤 선물도 받지 않았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있듯 삶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은 진실들이 더 우글거린다는 걸 아는 나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은 지나치게 생각만 많아진 어른이었다. 

학부모가 보내온 커피와 음료조차도 돌려보내며 "마음만 받을게요.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마지막 유치원이었던 근무지에서 한 엄마가 쪽지와 함께 직접 만든 비누를 보내왔다. 그 쪽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선생님, OO위해 애써 주셔서 감사한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마음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 더 잘못이라고 원장님께 전해주세요" (학부모는 원장님을 향해 말했지만 나는 어쩐지, 나에게 그리고 사회에게 던지는 물음 같았다)

'마음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 더 잘못'이라는 말을 오래 생각했다. 정성스럽게 만들었을 비누를 들고 한참을 고민했던 게 떠오른다. 정성스러운 선물은 주는 이의 마음이 훤히 보인다. 첫 직장에서 학부모가 준 케이크 밑엔 상품권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상품권 두 장을 들고, 어떤 심정으로 케이크 밑에 이것을 넣었을지 생각의 가지들은 끝없이 뻗어 나갔다. 돌려줄 타이밍을 놓친 나는 오랫동안 그 일이 불편했고, 돌려주지 못한 그 마음 안에 욕심이 끼어든 건지 두고두고 의심하며 반성했다. 불편하게만 하는 선물도 있는 법이었다. 진심은 부러 꾸미지 않아도 전해지는 법이었고, 불편하고 고민이 많아지는 선물은 도리어 하지 않는 편이 나을 때가 더 많았다. 


선물과 촌지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었다.  

그것을 두고 사람을 사고 진심을 휘두르는 그 마음판이 늘 문제였다. 그러니까, 선물에 놓인 진심, 그 속에 든 불손한 마음. 본질을 단단히 붙들지 않으면 늘 불순물이 끼거나 다른 생각이 끼어들어 본질을 빗나간 욕심을 부리게 했다. '촌지'를 받고 싶어 한 그 마음엔 촌지를 주지 못한 학생에 대한 차별을 불러왔다. 결국 그 욕심은 어린 나에게도 전해져 불합리한 차별을 겪게 하고, 부모 다음으로 중요했을지 모를 사람이 상처를 남겼다. 촌지를 찔러 줄 푼돈 조차도 가지지 못한 엄마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요구르트'가 전부였을 테다. 자신이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 어찌 보면 엄마는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 촌지를 준 셈이기도 하다. 그 시절 한 반에 40명이 웃도는 아이들의 요구르트 값을 지불한 셈이니. 비단 가난한 사람이 나뿐이었을까. 촌지를 마련하기 위해 가진 돈을 긁어 모아 몇 푼 되지 않은 돈을 고개를 조아리며 전했을 엄마도 있었을 터였다. 처지와 가난을 묵살하고 자신의 주머니 채우기에 급급한 그 시절의 선생님들에게 촌지를 주지 못한 학생을 대하는 교사의 차별적 '태도'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씁쓸함이 도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건 그 되지도 않는 차별이 지금도 교단에 교실에 횡행하다면 아이들의 등교를 멈추고 목소리를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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