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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Sep 24. 2021

이혼 협의서

결혼 11년 만에 처음으로 '이혼 협의서'란 것을 작성했다. 싸움 끝에 "이혼해"라는 말을 달고 살고 장난하듯 "이혼해"라는 말을 백 번 했어도 정말 원했던 적은 없었다. 그것은 현실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다.

부부 싸움이란, 전날 손하트를 날려가며 꽁냥꽁냥 좋다가도 맑은 하늘에 벼락이 내리치듯 서로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일과 같았다.

싸움의 시작은 늘 치약을 끝에서 또는 중간에서 짜냐와 비슷한 사소한 일로 시작해 서로의 가슴에 피멍을 기어이 남기고야  마는-  가슴이 쩍쩍 갈라지는 지진 같은 창대함으로 줄곧 진행됐다.  

이날도 어김없이 남편은 등을 보였고 (매일 같이 아빠의 등만 보고 산 엄마가 생각이 나서,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말로 남편을 찔렀고, 내 말에 찔린 남편은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고 두고두고 내 가슴에 남을 만한 엄청난 말을 쏟아 놓았고, 나는 그 말에 온 마음을 다쳤다.

그날, 서로에게 던 진 말들은 폭력이었다.


외상은 입지 않아도 내상을 입히는. 외상을 입지 않았다고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건지. 손으로 하는 폭력과 뭐가 다른지 내내 생각했다.  

나는 내가 던진 폭력에 대한 변명을 하며 그를 이해시키려고 몇 번이고 설명했고, 그는 너도 한번 어떤 기분인지 느껴봤으면 싶었다고- 했다. (더 절망스러웠다.) 곧, 그는 괴로운 듯 이야기했다.

"싸우면서 부모님 얘기는 하지 말자. 부모님은 부모님의 인생이 있고 그들만의 사정이 있다고. 우리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거야"

알고는 있었지만 알고만 있는 것으로 그친 나는 늘 부모님들의 인생을 번번이 재단했다. 부모님들의 잘못한 부분을 짚어 갔던 것은 그들의 인생을 이해해 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이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다짐인 동시에 그렇게만 살아온 엄마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


남편 말이 맞았다. 어떤 말로도 포장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말 안에는 너무 많은 의미와 존중이 내포되어 있었다.

계속 눈물이 나오려고 했고(어는 순간 부부 싸움에서의 눈물은 여자의 전유물인 거 같고, 반응 없는 그가 더 기분 나빠) 안간힘을 다해 참았다. 오랜 시간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고, 온 마음이 타들어 가는 거 같은 마음 위로 그 가 한말을 비로소 인정했다.

그리고, 나는 그와 내가 한 말과 상처에 책임을 지고자 이혼 절차를 밤새도록 검색했고,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목록을 세웠고...

그러다, 너무 먼 이야기 같아서 '내'가 정말 이혼을 할 수 있을지, 이 가정을 해체할 수 있을지 그런 '결심'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새벽 늦도록 나를 점검했다.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 나든 계절은 고요하고 해야 할 일들은 손길을 기다린다. ​

다음 날, 한낮에 카페에서 운동복 차림을 하고 나는 친구 앞에서 울고 있었다.  남편의 말에 곤두박질친 마음이 내내 아팠지만, 내가 정말 괴로운 것은 여자로서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 앞에 자신이 없고 덜컥 겁부터 난다고. 이렇게 연약한 나 자신한테 욕지기가 나온다고. 어린 시절의 냄새가 나는 친정으로 가서 사는 것도 겁이 난다고. 아빠를 떠나지 못한 엄마가 내 모습이기도 했다고. 아름다움이라고는 세상에 없는 듯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은 심연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슬픔에 나를 또다시 사로잡히게 했다.

서로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살을 섞고 사는 서로에게 상대의 무너짐으로 자존심을 세우고 ‘사랑'이라는 말조차 사치이고 사랑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했나 의심이 들 만큼 그와 나의 부부 싸움은 상처를 파먹고 사는 기생충처럼 서서히 잔인하게 변질되어 갔다.

부부라는 이름하에 누구나 작성할 수 있는 이혼 협의서를 들고 그 모든 절차를 실행에 옮기며 법원까지 입장하는 일. 그들에게 그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남편은 되물었다. ​

"그럼 너는 네가 그 모든 일이 가능한 여자였으면, 했다는 거야?"​

나는 그렇다고, 아니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가보지 않은 길을 무슨 근거로 답할 수 있을까.

단지, 나보다 더 엄마의 삶을 이해하는 남편의 입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모든 게 다 내 잘못이라는 자책감과 자괴감이 동시에 밀려왔고, 머리에선 빨간불이 켜졌고, 변질과 무너짐을 반복하는 부부생활을 멈추고 싶었다.


이를 멈추게 하는 자극제가 필요하다 여겼고, 상대가 원치 않는 행동을 멈추게 하는 것으로 이혼 협의서를 이용했다. 이혼 협의서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한 암묵적인 합의였다. ​나는 실행에 옮기지 않더라도 이혼조정 기간 동안 서로에 대해 시간을 가져 보자고 제안했고, 그는 그 언저리라도 닿는 것이 싫다 했다.


생각을 굽히지 않는 그 앞에서 나는 그에게 아니 나에게 다시 '시간'을 주었고 약속한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협의서를 작성하고 인감도장을 꺼내와 도장까지 찍었다. 법원에 가지 않는 조건으로.  그는 협의서 앞에서 다시 한번 나에게 '영원'을 다짐했지만, 나는 그저 우리가 서로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르겠지만 그 협의서는 나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살면서,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을 절절히 공감하며 살았지만, 흉터가 남지 않는 상처는 없었다.  지나간 칼날에 파동을 일으키고 붙어 버린 물살이지만 칼이 지나간 자리는 남는 법이다. 물과 같이 보이진 않아도.  이따금씩 속상한 일을 끄집어 내 서운함을 토로하는 것처럼 몇 번이고 그날 일을 되짚겠지. 그러면서 다시 농을 주고받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낄낄대고 예측할 수 없는 갈등을 겪을 테다.


결혼생활은 그렇게 베인 상처를 상대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덮어 두고 일상 곳곳에 놓인 자잘한 행복들로 또 살아지는 것이었다. ​뜨거우리만큼 한 여름의 강렬한 싸움이 지나갔고, 나는 여전히 우리의 공간에서 여름을 사는 중이다. ​복숭아처럼 예쁜 과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삭한 복숭아가 너무 맛있어 이 여름날이 행복하기도 했다.


고요한 밤 시간을 누리는 것도.

그러니까 우리 잘 살아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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