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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Sep 24. 2021

잔여 백신 알림을 신청한 건 제주도 한 달 살기를 다녀온 직후였다.

1초 만에 눌러도 되지 않던 백신 알림이 부쩍 잦다고 느끼고, 9월 말로 예약 날짜를 잡아 놓은 상태였지만- 빨리 맞아 버리고 싶은 마음에  끈질기게 버튼을 누른 끝에 어제 오후, 잔여 백신 화이자를 맞고 왔다.

싱겁게 끝난 백신을 맞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유난히 자주 마주치는 이웃과 인사를 하고, 동네 화젯거리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근황을 묻고 관습적인 미소를 주고받으며 헤어지는 일상-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았다.


미리 준비한 그날 지은 밥과 반찬을 식탁에 올려놓고 아이들이 밥숟가락을 들고 입안에서 음식물을 오물오물 씹고 있을 때쯤 주사를 맞은 부위 쪽으로 얕은 근육통이 시작되었다.


침대에 누워 있기가 마땅찮아 보던 책을 꺼내 마지막 이야기를 읽어 내려갔다.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 소설의  마지막 이야기를 읽다가 끝내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그 저녁, 그렁하게 차오른 눈물을 쏟으며 오랜만에 콧물까지 흘리며 엉엉 소리를 삭히며 울어버렸다.


말끔하게 닦인 저녁 식기들이 가지런했고, 무엇도 올려놓지 않은 주방 선반에서 반짝 빛이 났고, 세이펜에서 동화책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리고, 아이와 애 아빠가 떠드는 소리가 중간중간 들려왔다.  그런 저녁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슬픔에 잠긴 누군가에게 '바깥'이라고 불릴 수 있는  바깥. 안과 바깥이 다른 초가을이었다.  


캐럴라인 냅은 '나는 사회적 의무로 꽉꽉 채워진 주중에 참석한 파티에서, 방 안 가득한 스물다섯 명의 사람들 속에서도 고립될 수 있다'라고 했는데, 진하게 밑줄을 그으며 나도 그런 자아를 가진 사람임을 자각했다. 나도 그런 자아를 가진 사람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 마지막 문장을 남겨 놓은 상태에서 엉엉 울며, 문득 괜찮다고 되뇌어 온 모든 일에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마지막 콧물을 세차게 풀고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덮었다.


작년 여름이었다. 엄마의 가여운 얼굴, 목울대에 걸려 버린 목소리, 불쌍하고 한 섞인 눈물 끝내는 자책으로 한꺼번에 파도처럼 덮치고 물러났다.  

엄마가 아빠 호주머니에서 날짜와 시간이 정확히 찍힌 모텔 영수증을 꺼낸 날로부터... 사실 나는 무너졌는데, 애써 부인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울었으니까. 엄마가 먼저였으니까.

지금껏 '잘'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 냈다고 말하고 싶은 날들이 비눗방울처럼 떠오르다 허공에서 터져 버린 거 같은 허무가 밀려왔다. 이십 대 중반에 만난 남편과 연애를 하며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온전한 그의 사랑을 받으며 새롭게 '행복'이라는 단어를 채워갈 수 있다고 믿었다. 남편과 겪은 어려움은 내가 살아오며 겪었던 어려움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였고, 기꺼운 마음으로 이겨내고 버텼다. 입이 찢어지도록 행복한 날엔 불행한 기억이 득실대는 곳에 두고 온 엄마 얼굴이 떠올라 죄책감을 머리에 이고 엄마를 많이 생각하고 챙겼다. 예쁘고 잘 생기게 태어난 아이들은 너무도 귀했고, 온 가족이 두 아이에게 매달린 날 들 속에서 다시 '가족'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새겨 볼 수 있을 거 같은 희망도 품었다.


아빠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가다 J는 내게 네가 쓴 글을 다시 한번 읽어봐-라고 했다.

잘 살아보고자 노력과 최선이라는 이름으로 세워 둔 글과 평범한 날들이, 행여 어긋날까 살피고 보듬었던 나의 믿음과 희망이 무너졌음을 그 눈물을 그렇게 쏟아내고서 깨달았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무너진 믿음과 희망의 부스러기들을 끌어안고 여러 날 내 몸에 머무르고 스쳐가고 더듬던 끔찍한 '손'까지 떠오른 건.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어쩌면 그 손의 주인공이 '아빠'가 아닌가- 이르렀을 땐 그만 죽어버리고 싶었다. 11층에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

잠든 아이들 방으로 기어 들어가 눈썹이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고 감춰진 발가락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곤 까맣게 내려앉은 밤을 흘려보냈다.

엄마가 지금 좀 안 좋아서 상처 주고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반성문을 꾸역꾸역 쓰고 삼키며 나왔다.


일상은 가끔 잔인하기도 해서, 웃은 얼굴로 사람을 마주 보게 하고 슈퍼에 가서 저녁 찬 거리를 사게도 한다.

사소한 일로 고함을 지르고, 화가 났다 좋아다가를 반복하고 내 우울감을 그만 보내버리고 싶어 나 정신과에 다녀올까 봐- 했던 날

남편은 어쩌면 그것은 네 이력에 남을지도 모르고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 남편을 빤히 바라보다 픽- 웃어버렸다.

J는 갔다 와봐 너 갔다 오고 나도 가게- 마음이 덩그러니 멈췄다가 픽- 웃어버렸다.

종전엔 돈이 꽤 들까 싶어, 가지 못하고 있는 내가 우스웠다.


바깥은 여름인데 나는 봄도, 여름도, 가을도 아닌 어느 경계쯤 서서 무수한 날들을 떠올리고 복기하고.

바깥은 여름인데 내내 그 시절을 걷고 또 걷고.

깊숙이 들여다보고 들여다보니 어린 나는 그저 '사랑'을 받고 싶었나 보다. 오롯하게 자신에게 머무는 안정되고 따뜻하고 보호받고 있다는 부모로부터 파생되는 사랑.

'삶'이라는 자연스러운 풍경 앞에 엉뚱하게 놓여 있는 내가 느닷없이 내 몸으로 들어온 손끝에 매달려 그것이 '무엇' 인지도 깨닫기 전에 삶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 누구 때문인지 자꾸 '이제 와서' 책임을 묻고 싶었고, 분노가 일어 돌아버릴 거 같았고, 무고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엄마 얼굴에 대고 묻을 수조차 없어서, 어떤 날은 엄마의 그 무고함 마저 '잘못'이라고 악다구니를 쓰고 싶어서. 그 시절 아빠 너는 대체 어떤 사람이 이었냐고 따지지 못해서.  마음이 차갑게 식다가, 까맣게 타들어 가다, 표정 없는 얼굴로 바깥을 바라보다 밥을 먹고 커피를 내리고 밤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멀뚱하게 바라봤다.


마음에 많은 것을 담고 사는 내게 글은 박연준 작가의 말을 빌려 일종의 '해방'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글거리고 있는 말을 마음에서 꺼내는 일. 그러고 나면 마음에 누구도 아닌 '글'이 위로를 주고 있음을 느꼈다.


J가 '그래도 아빠잖아'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래도 아빠였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고 3 때 입시장까지 차를 태워주던 때 같은.

내 아이- 어린 쌍둥이를 돌보아 주던 때 같은.


그 손이 아빠가 아닐 거라는 확신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느닷없는 그 생각이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엄마 옆에 있는 아빠를 어떤 얼굴로 보아야 할까.


비가 그치지 말고, 가을이 오지 않고 여름이 내내 머물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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