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renB Sep 26. 2021

HOME1

'집'에 대한 몇 가지 기억이 있다.


엄마에게 들은 '집'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는 '부산'에 살았던 당시였다. 어린 동생과 내가 깊은 잠에 빠졌을 시각은 한밤중이었을 터. 태풍을 동반한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강한 바람에 날아온 바위 같은 돌덩이가 하필이면 지붕 위로 떨어져 곧, 지붕을 뚫고 작은 동생의 발등으로 낙하했다. 엄마에게 나는 다치지 않았냐고 여러 번 물었던 거 같은데 그때마다 엄마는 너는 다치지 않았어-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속에서 묘한 죄책감 같은 게 밀려왔고 나도 다쳤어야 했나- 하는 얼토당토않는 생각까지 했다. 덕분에 동생은 야트막하게 솟아 있는 왼쪽 발 등을 가졌고, 그 아래로 중지 발가락이 튀어나와있다. 나는 동생의 발을 볼 때마다 기억에도 없는 그날 일을 상상하며 떠올릴 때가 많았다.


이후,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부산에서 경기도권으로 이사를 왔다. 그 집은 대문을 열면 한 지붕 아래 서너 가구가 사는 작은 마당이 딸린 곳이었는데 마당엔 수돗가가 있고,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개중에 돈이 많은 가구가 한가운데 방과 그 옆에 작은방이 딸린 곳에 살았다. 나는 그 마당을 등지고  오른쪽 구석으로 들어가야 나오는 방에 살았는데 긴 부엌이 딸린 집이었다.

어느 날은 그 긴 부엌에서 오줌을 누고 바지를 치켜 올리다 소박한 그릇이 놓여 있는 선반에 머리를 박았는데, 너무 아픈 데다 화가 난 어린 내가 손으로 유리 문을 갈겼고, 깨진 유리 문이 보기 좋게 내 허벅지 살점을 뜯어 놓았다. 정수리엔 혹이 나고 허벅지에서는 붉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엄마가 어떻게 알고 왔는지 어는 순간 나는 엄마 손에 붙들려 병원을 갔고, 마치 구멍 난 양말을 꿰매듯 의사는 벌어진 내 허벅지 살을 무뚝뚝하게 꿰맸다. 내 허벅지엔 10개의 다리가 달린 지네가 박혀있다.


나는 다 커서, 그 재래식 화장실을 '똥통'이라고 불렀다. 그 똥통에 다리 한쪽이 빠진 일도 있었는데, 도무지 어떻게 똥통에 다리 한쪽이 빠진 건지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한쪽 다리가 변기에 박힌 채 울고 있는 강렬한 기억 속으로 다리에 묻은 변을 어떤 모습으로 처리했는지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버렸다. 똥통에 다리가 빠지다니, 탄식 섞인 생각이 떠오를 때면 쓴웃음을 머금은 채로 왼쪽 다린지, 오른쪽 다른지 분간하려 애썼다.

아침이 되면 흩어졌다 밤이 되고서야 모이는 방에서 엄마와 아빠, 어린 동생과 집에 머무르며 공유했던 기본적인 기억조차 없는데 어느 밤엔 머리까지 뒤집어쓴 이불 속에서 불규칙적인 소리와 움직임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는지는 그로부터 한참을 더 살아낸 뒤였다. 빛이라고 없는 어둠 속에서 엄마와 아빠가 포개져 있을 거라는 예측과  또렷하게 들려왔던 소리와 움직임. 끈적한 숨소리를 숨죽여 듣고 있는 어린 내가 나는 가여웠다.


하교 후엔 소란한 또래들 틈에서 늘 고개를 땅에 처박고 터벅터벅 텅 비어 있는 집으로 걸어갈 때가 많았다. 한 날은 깡팬지 미친놈인지 그냥 학생인지 모르겠는 남자 학생에게 붙잡혀 게임이었는지, 돈도 없는 내게 돈을 빼앗으려 했는지, 가위바위보를 했는지도 기억나질 않고 그의 요구(그 요구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를 들어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어처구니없게도 어린 나에게 '볼 키스'(입 키스가 아님이 다행스럽기도 하다)를 요구했다. 우물쭈물 대는 나에게  볼 키스를 받아낸 그 미친놈의 표정보다 기어코 그 볼에 내 입을 갖다 댄 내 모습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행히 나에게 어떤 해코지를 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지, 낮이었는데도 캄캄한 방에 숨어들어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기억에 없다는 데에 더 큰 좌절감이 밀려왔다.


캄캄한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꾸 아빠같이 큰 사람이 따라오는 거 같은 불확실함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는 힘을 다해  뛰고 또 뛰어 마당의 철문을 열고 구석에 박혀 있는 집까지 숨도 쉬지 않고 뛰어 기다란 주방 앞에 있던 문고리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던 기억은 문고리를 잡아당긴 내 손끝에서 왔다. 그 거대한 덩치가  착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반대쪽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힘으로부터 알았다. 그 거대한 사람이 비루한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니 내가 이겼나. 기억은 늘 이렇게 궁금증을 남기고 끊겨 버렸다.     



집은 무서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내가 숨어든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으며, 집도 결코 '안전' 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곳이기도 했다.



공포와 두려움을 내내 몰고 왔던 그 마당에서 돈이 제일 많았던 이웃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덕분에 우리 가족이 그 한가운데 집을 차지하게 된 적도 있었다. 큰 방 옆에 딸린 작은방에서 잠을 자다 악몽을 꿨는지 천둥 같은 고함을 지르는 어린 나를 큰 방에서 건너온 엄마가 안아 주었던 기억을 붙들고,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에게 얻어맞아 피를 흘리며 원망 섞인 눈으로 나를 보던 '엄마'를 텅 빈 눈을 하고 바라보는 어린 내가, 낯선 괴물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이 늘 머리와 마음에서 오버랩되어 보였다.


그런 기억들을 품은 채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아파트'라는 곳에 살게 되었다.


18평 아파트로 새 출발을 하러 가기 전, 이전 보다 더 작은 방이라고 기억하는 곳에 잠깐 머물렀던 것을 기억하고 엄마에게 물었던 적이 있는데, 그걸 기억했다고 엄마는 놀라워했다. 네 식구가 눕고 나면 딱, 그만큼의 방 앞으로 작은 주방과 주방 문을 열고 나오면 재래식 화장실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집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방문을 열었는데 아랫도리가 벗겨져 있는 채 아래에 있는 엄마,  엄마 위에서 자신의 것을 붙잡고 있던 아빠를 정면으로 맞닥뜨렸던 때는 어느 기억 보다 선명히 남았다. 중간은 사라지고 엄마는 생뚱맞게 내 머리를 빗기며 신경 쓰지 마 아빠가 장난친 거야-라고 했던 말은 딸아이의 머리를 빗기며 난처한 얼굴로 앉아 있는 젊은 엄마의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소리가 되어 둥둥 떠다녔다.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천진한 어린 나'로 살지 못해 나는 늘 내 결핍이 아프고 슬펐다. 작은 상에 밥숟가락을 올려 김치를 먹을 수 있었고, 추울 땐 이불을 덮어 작은 몸을 웅크리고 잘 수 있는 방이 있는 것과 엄마와 아빠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는 사실만으로는 나에게 어떤 기쁨도 위로도 되지 못했다. 나에게는 그랬다. 나는 늘 형체도 없는 겁에 질려 납득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는 상황에 그저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말갛고 어둡게 놓여 있었다.


네 식구가 모여 함께 밥을 먹는 것과 같은 정서적 유대감이 없다는 것은 자라오면서 다양한 영역과 관계, 사회적 기술과 삶의 방식, 성격과 성향, 태도와 습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결코 상처받지 않을 거 같은 결연한 얼굴로 타인에게 적대감을 들어내거나 나를 좋아하거나 내가 좋은 타인에겐 과잉친절을 베푸는데 익숙한 관계 즉 극과 극의 상태에 놓이게 하는데 일조를 했다.


애석하게도 어린 시절 집에 대한 기억은 지울 수 없는 상처로만 남았다. 그래서 나는 웃고 있어도 슬픈 얼굴이 무엇인지 안다. 어째서 집을 떠올리면 불행한 기억만 떠오르는 건지 의문을 품은 채 마치 그것이 전부인 거 같은 불온한 기억들을 끌어내다 보면 결국엔 '어린 나'를 알뜰살뜰 돌보지 않은 젊은 엄마, 아빠 탓을 하고 싶어진다는 것이었다.


가끔은 어깨에 뽕이 달리고 허리선에 큰 리본이 달린 원피스를 입고 종아리까지 오는 새하얀 반스타킹에 번쩍 빛이 나는 구두를 신은 어린 나를 이따금씩 상상했다. 우습게도 '행복'이라는 단어가 내가 상상한 그 모습에 함축되었다. 경험해 보지 않은 '행복'을 딱 그 수준으로만 해석했다.

                              







'내 집이 최고야' 소리가 절로 나오는 'house'가 아닌 'home'이 있다는 건 정말이지 감사한 일이었다.

네 개의 방이 딸리고 주방과 분리된 거실이 있고, 다리가 빠질 일이 없는- 똥통이 아닌 말끔한 화장실이 두 개나 있다면 더욱 그렇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요즘 대부분의 지출을 '식물'을 집으로 데려오는데 쓰고 있다. (재난 지원금으로도 식물을 샀다!)

잠깐 외출을 했다 집에 들어오면 식물 앞에 앉아 시간의 틈을 붙잡고 새 잎을 빼꼼 내민 식물을 바라보는 일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아이들에게 집에 대한 좋은 기억을 심어 줄 수 없을 거 같을 때,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기억들로 마음이 어지러워 누군갈(대부분 남편) 붙잡고 잔소리를 가장한 히스테리를 부리고 싶을 때(근데, 종종 남편이 잘못? 을 한다) 돌연 고개를 돌려 식물을 보며 한 템포 쉬어가는 연습을 하고 있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이리부농 커피가 먹고 싶어 커피를 사고 내가 좋아하는 꽃집을 갈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비가 한두 방울 떨어졌다. 우산을 챙겨 꽃 가게로 가는 길에 집 앞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내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작은 꽃집인데 식물을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고- 하며 갈대와 까치밥이라는 처음 보는 식물을 주문하고 '오색 마삭줄' 이라는 식물까지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한두 방울 내리던 비가 멈춰 있었다. 새로 온 식물이 있을 곳을 정하고, 잘 말린 장미를 화병에 꽂고, 건강해진 행잉 식물을 시계 밑으로 걸어 두다가 집에 대한 기억들이 느닷없이 우르르 쏟아졌다.


뚝.


내 공간으로 기어 들어왔다.

당신과,  그리고 . 우리 모두 가정이라 불러지는 공간에서 아프고 슬픈 기억들이라 불리는 상황에 놓여 있지 않기를.  기도가 모르는 이에게도 가닿을  있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이혼 협의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