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동쪽 여행은 극기훈련
노쇼라니, 비행기를 놓친 나는 한 손엔 짐가방을 한 손엔 두 아이를 잡고 황망한 채 서 있었다.
상상만 했던 일이 실제로 나에게 일어나다니.
하루 늦게 오기로 한 남편 없이도 공항에 도착해 한창 하늘을 가르고 있을 시간인데, 어이없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매끈한 바닥에 붙박여 서 있었다.
버스도, 택시도, 기차도 아닌... 비행기를 놓쳤다. E 티켓을 왜 확인하지 않은 거냐며 공항 직원에게 따져 묻고 애꿎은 전화기를 붙들고 남편에게 하소연을 해도 떠난 비행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억울했다. "E 티켓을 보여 달라는 공항 직원의 안내만 있었어도 비행기를 탈 수 있었잖아요" 억울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거듭 올라왔다. 9만 원가량을 더 지불하고 제일 빠른 티켓으로 예매하고 나니 배고픔에 지친 아이들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항 보안요원은 왜 이 것(예매 확인증) 말고, 바로 입장 가능한 'E 티켓'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반드시 안내해야 하는 의무사항은 아니었어도 매일 공항을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수만 가지의 상황과 사정이 있을 텐데. 서비스직의 일은 정해진 매뉴얼이 없다. 자신이 일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느냐에 따라 일의 질과 제공받는 서비스의 질이 달라질 뿐이었다. 공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을 예측하여 적재적소에 필요한 서비스를 센스 있게 왜 제공하지 않는 거야, 따져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정해진 일(발권을 확인하는 일, 검색 수색대를 지키고 서 있는 일 등) 외에는 그 어떤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없다는 식으로 들리기도 했다. 서비스를 운운하는 내게 총괄 책임자는 자신들이 그것들을 모두 제공할 필요도 의무도 없다고 이야기하며, 그 기준(자신들이 하는 일과 서비스라 불릴 만한 일)이 애매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아이들을 보며 내리 한숨을 쉬었다.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에 무엇도 먹을 수가 없었다. 시간을 때우기에 카페만 한 곳이 없다. 널찍한 카페로 들어가 제일 큰 사이즈의 라테를 시키고 두 아이에게 영상을 틀어 주었다. 이런 일쯤이야, 일어날 수 있지. 됐어! 잊어버리자. 나는 너그럽게 넘기지 못했다. 공항 보안 요원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고, 민원센터 번호를 알려주며 민원을 넣어도 자신들은 할 말이 없다고까지 했다. 억울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자신 같았으면 더 했을 거라는 민원센터 직원은 죄송하다는 말 이외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보였다. 공항 보안요원의 '교육' 팀장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은 나는 거듭 사과했던 그에게 비행기 출발 직전 도저히 가시지 않는 억울함으로 '보상'을 요구했고, 내일쯤 회신을 부탁한다고 하며 비행기 모드 버튼을 눌렀다.
렌터카 직원의 퇴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헉헉거리며 공항을 빠져나왔다. 바삐 움직인 게 허무할 정도로 한참을 기다리게 한 렌터카 직원에게 아직 멀었어요,라고 물으며 사서 고생하는 거 같은 기분을 애써 떨쳐냈다. 이미 해가 져버린 뒤였고,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스스로 괜찮다고 중얼거리며 숙소로 향했다. 편의점에서 저녁으로 때울 국밥을 사고 과자 몇 봉을 사고 어쩐지 더 깊어져 가는 숲 속으로 차를 몰았다. 노루 한 마리가 차 앞으로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숲길이 이어지자 신경이 더욱 곤두셨다. 껌껌한 와중에 멀리서 은은한 불이 켜진 작은 집이 보였다. 깜빡이를 켜고 시동을 끈 시각은 밤 9:30분.
제주 동쪽 비자림 쪽에 위치한 '철없는 펜션'은 은퇴한 부부의 따스한 손길이 머문 곳이었다. 솔직한 표현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고, 자신들을 '철없다'라고 표현하는 소개글에 진정성이 느껴져 불과 출발 3일 전에 예약한 숙소였다. 노쇼 상황을 듣고 부모님처럼 걱정하던 사장님의 마음에 눈가가 시큰시큰했는데. 숙소도 사장님의 따스한 마음처럼 포근했다. 구석 틈틈이 소담한 소품이 놓여 있고, 2층 다락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이 그득했다. 하루의 피로가 확~ 날아갈 정도로 마음이 밝아졌다. 내일 도착하는 남편과 새로운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하면 될 터였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 사는 고양이와 개에게 인사를 하고, 두 아이가 아침을 다 먹고 씻고, 그날의 옷을 입고 나서면 발소리를 듣고 나온 사장님이 웃는 얼굴로 아침 인사를 건넨다. 오늘은 어디를 가느냐고 묻고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대하시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잘 다녀올게요, 기분 좋게 인사를 하고 나가면 끝난 줄 알았던 고생스러움이 말도 안 되게 이어졌었다.
엄동설한에 두 아이가 함덕 바다에 빠졌고, 한라산을 가로질러 서귀포로 가는 차 안에서는 딸이 아침밥을 게워 냈다. 바다에 빠질 수 있으니 조심히 놀아, 속이 좋지 않으면 아빠한테 꼭 말해, 아이들을 살피며 여러 번 이야기해도 약속이라도 한 듯 물에 빠지고 토를 했다. 가뭄에 콩 나듯 없는 옷가게를 찾아 새 옷을 사서 입히고는 마땅한 곳이 없어 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젖은 바지와 신발의 모래를 털어 냈다. 딸이 아침밥을 게워낸 날은 한라봉 따기 체험을 하러 카페로 향하던 길이었다. 도착한 카페에서 발판에 쏟아놓은 토사물을 닦아 말려 놓고(마침 수돗가가 있었다!), 딸아이의 바지를 비좁은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며 빨아 볕이 잘 드는 곳에 널어놓고 테이블에 앉아 우아하게 커피를 마셨다. 마치 저기에 비루하게 놓인 바지가 내 딸의 바지가 아니라는 듯. 여행을 하는 것인지 고행을 하는 것인지 헷갈려하며 잘 익은 한라봉 따기에 열심이었다.
빌린 차에 쏟아 놓은 토사물을 치우다 불현듯 두 아이가 돌이 지나자마자 떠났던 '괌'에서의 극기훈련이 생각이 났다. 돌 무렵의 아이는 자리값을 받지 않는다고 하여 고민 없이 떠났던 여행에서 평생 잊지 못할 강렬한 생고생만을 남긴 채 돌아왔었는데 그때의 그 고생이 떠오를 만큼의 힘듦이었던 것이다. '괌'을 떠올리면 고생한 기억밖에 없어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무엇을 먹고 왔는지 조차 까맣게 잊을 정도의 고생이었는데 말이다. 크면 나아진다고 누가 그랬는지. 아이들은 골이 지끈거리는 쪽으로 더 진화했다. 나는 성질머리만 더 고약해져서 매일 반성문을 써도 모자랄 지경으로 철이 없는 엄마였다.
쉬러 간 여행은 숙소에 도착해서야 그 의미를 되찾았다. 극기훈련인가 싶은 하루를 마치고 어둑해져 숙소로 돌아오면 그제야 엉덩이를 붙이고 쉬게 되는 기이한 여행이었다. 첫 시작을 삐끗 하니 번지듯 삐그덕 거리는 여행인가 싶어 아이들을 나무라고 남편과 다투고 나면 허무하기만 한 시간들이 지나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앞에서 나는 후회를 일삼았다. 이러지 않았더라면, 저러지 않았더라면 소득도 없고 감정만 소모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바닥이 보일 때까지 마음을 털었다. 공항 측에 요구한 '보상'은 애초에 무리한 요구였음을 알고 있었다. 더 부지런을 떨지 않은 나도 잘못이지, 생각이 들다가도 공항 측의 응대가 아쉬워 탈 수 있었던 비행기를 놓친 거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일로 인한 억울함, 고생한 아이들, 여행의 하루를 날려버린 속상함을 알려야 했다. 나아가 문제라고 보이는 부분들에 대한 개선점을 찾아 차츰 보완해 나가기를 바랐다. 나는 꼭 그렇게 내 생각과 감정을 알리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성미의 사람, 간혹 철이 없어 보이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마지막 날에 들린 시장에서 회를 비롯한 갖가지 음식을 사 와 식탁에 펼쳐 놓고 늦은 시간까지 남편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조금 선선해진 마음으로 지나간 시간을 짚고, 각자의 잘못을 인정하며 나의 부족함을 들추지 않으려는 남편의 태도에 고마웠다. 크게만 보였던 일은 지나고 보니 이미 건너온 일이 되고 했다. 점처럼 작아져 있는 일에 왜 그렇게 유난을 떨었나 싶기도 했다. 다 쏟아낸다고 더 나아지는 것도 없었지만 가끔은 더 나은 쪽으로 흐르기도 했고, 원하는 쪽으로 일이 흘러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남편은 철없는 내가 언제든 뉠 수 있는 '집'같은 사람이었다. 마치 지금 이곳처럼. 대화 말미에 네가 언제든 날아갔다 돌아올 수 있도록 자신은 집을 지키겠다는 말에 그동안의 고생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고마운 마음을 감추고 철없는 나는 마음껏 철이 없기로 하면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철없는 사람이 묵기에 제격인 철없는 펜션이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