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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Mar 21. 2022

옥수수를 내밀 던 이

라오스 시절에

패티 스미스님의 꿈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그날의 옥수수가 떠올랐어.

특별했던 옥수수 이야기를 해줄게.




라오스 방비엥이었어.

아직 건물도 올라가지 않은 빈 땅을 보며 오라버니가 그랬어. 저기에 호텔 하나가 들어올 거라고. 그 얘기를 듣곤 친구와 나는 먼저랄 것도 없이 저기 호텔이 다 지어지면 꼭 묵자고 이야기했어. 세 번째 라오스 여행이었고, 꼭 1년 만이었지. 우린 쏭강을 마주 보고 있는 호텔 수영장에 앉아 있었어. 유난히 한낮의 볕이 눈이 부셨고, 온몸을 휘감은 태양빛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어. 우린 시간을 붙잡고 내내 사진을 찍었어. 우리 뒤에서 귀여운 외국인이 포즈를 취한 채 서 있는 줄도 몰랐지. 서로의 여행을 존중하며 각자의 시간에 잠깐 끼어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시간이었거든. 썬베드에 누워 있던 낯선 이의 심장 아래로 조개가 선명히 새겨져 있던 문신을 훔쳐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아름답지 않은 걸 찾으래야 찾을 수 없었던 날이었거든.

시간 틈으로 흘러 들어오던 흙먼지마저 기억이 나던 그날, 우린 빨간색 버기카를 빌렸어. 도착한 시크릿 라군 2에서 작은 돗자리를 펼치고 비어라오 골드를 피쉬볼 안주와 곁들여 먹었어. 어느 틈엔가 안고 있는 현지인 꼬맹이와 놀던 친구의 모습이 생각나. 풍경이 우리 안에 녹은 것인지 우리가 풍경 안에 녹아 있는 것인지 헷갈렸어. 작은 상점에서 팔던 반바지와 반팔티를 꽤나 흡족한 마음으로 구입하고는 방비엥 여행자 거리로 돌아갈 땐 서서히 태양이 뭍으로 가라앉고 있었어.



아마도 일하고 있던 오라버니에게 저녁에 보자고 우리가 먼저 연락을 취했을 거야. 해가 저문 방비엥 거리를 걸어 쏭강의 다리를 건넜어. 길게 줄지어 있는 식당 중 한 곳에 자리 잡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오라버니를 기다렸지. 컴컴한 다리에서 세상살이 귀찮은 발걸음으로 느긋하게 걸어오는 오라버니의 모습을 보고 키득거렸어. 식당에서 뿜어대는 불빛이 오라버니를 비추기에는 역부족이었거든. 거뭇한 실루엣이 오라버닌지 아닌지 우린 실랑이를 벌였어. 발걸음이 딱 오라버닌데. 내가 말했지.


쏭강의 강변식당의 밤 분위기.

종종 그날 밤의 꿈을 꿔.


선선한 밤공기가 차가워 겉옷이 필요할 정도였지. 삼삼오오 모여 있는 식당엔 각자가 만들어 낸 분위기가 자욱했어. 쏘맥을 먹자며 유리잔에 그득 채운 맥주에 소주를 손톱만큼 넣고는 쏘맥이라고 우겼지. 제주도의 딱새우처럼 생긴 구운 새우를 안주로 먹으며 우린 대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깜깜했어.

주고받은 이야기는 공기 중에 흩어지고, 플라스틱 통에 담긴 얼음을 몇 개 꺼내 양손으로 비벼 손을 씻던 오라버니 모습은 선명해. 오라버니의 온기로 녹아내린 물이 손바닥 사이로 뚝뚝 흘러내렸거든. 아마도 새우를 발라 먹기 위해서였을 거야. 쏭강의 물처럼 시간도 아주 천천히 흘러갔어.

소란한 방비엥 거리가 잠에 들 때쯤 우리 셋은 방비엥 거리를 걸었어. 오라버닌 얼마 전에 머물고 있던 숙소에 도둑이 들었던 이야기를 했고, 나는 비틀거리던 와중에도 그 이야기를 들었지. 맞아, 오라버닌 시시때때로 녹록지 않은 가이드 일에 대해 푸념을 섞어 이야기하곤 했어. 호텔 수건을 자신에게 바꿔달라고 했던 손님 이야기를 할 때는 기가 찬 분노를 보이기도 했지. 오라버니와 헤어질 땐 늘 아쉬웠고, 별일 없는 하루였으면 좋겠다가도 기갈나게 재미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바랐거든.


쏭강의 강변 식당의 풍경과 음식



자정을 넘긴 시각에 새벽까지 운영하던 비바 펍으로 향했어. 밤을 한사코 붙드는 사람들이 머리를 울리는 음악에 맞춰 연신 몸을 흔들고 있었고 나도 그 무리에 끼어 몸을 흔들었어. 코리아 친구들과 외국 친구들과 모두 하나가 되어 잊지 못할 밤을 강렬하게 보낸 날이었어. 친구의 머릿속엔 그날의 나의 망신스러운 춤과 돌발행동이 어떻게 남았을지 궁금하기도 했어. 이제는 잠에 들어야 한다고 간청하는 듯한 마지막 음악을 듣고서야 비바 펍을 나왔어. 귀를 때리던 음악 대신 소름 끼치게 고요한 방비엥의 파란 새벽이 온 얼굴을 때렸어. 쥐 죽은 듯 조용하던 밤거리를 호령하듯 친구는 걸었지.


루앙으로 가기 위해 미리 예약한 벤을 타려면 서둘러야 했어. 전날 밤의 숙취는 루앙에 가는 벤을 타기 위해 뒷전으로 밀려났지. 대충 씻고 아무 옷이나 주워 입고 예약해 둔 벤을 타러 출발 장소로 향했어. 날이 좋았던 걸로 기억해. 동남아스러운 태양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정오쯤이었나. 하늘을 올려다보면 절로 눈을 찡그리게 되는 날씨가 싫지 않았고, 그저 좋아서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오던 한낮에 아무리 기다려도 예약해 둔 벤이 오질 않는 거야.


한참을 기다리다 참지 못한 친구가 사무실을 지키는 여직원에게 우리가 예약한 벤은 언제 오냐고 솟는 화를 가라 앉히며 영어로, 한국어로 번갈아 가며 이야기했어. 여직원은 우리의 불만을 대충 알아듣고는 라오스 말로 떠들기 시작했는데, 웃기게도 알아들을 수 없는 서로의 언어를 우리는 얼추 알아듣고 있었다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친구의 목소리가 서서히 높아져 가고 있을 때, 그가 대뜸 옥수수를 내밀었어. 친구는 얼떨결에 옥수수를 받아 들고는 한알 한 알 뜯어먹기 시작했지. 사진엔 그날의 그 장면이 찍혔어. 친구가 옥수수를 들고 화를 삭이며 한 알 한 알 옥수수를 뜯어먹는 모습이. 앞에 앉은 그 역시 옥수수를 들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 모습이. 찰진 옥수수를 한 알 한 알 뜯어먹으며.   

친구는 의자에 앉아 다리 하나를 오른쪽 무릎에 올려 두고, 눈은 옥수수에 고정한 채 엄지와 검지로 옥수수를 한 알을 골라내며 입으로 가져갔어. 눈을 찌푸린 채. 그런데 말이야... 친구가 너무 행복해 보이는 거야. 인상을 쓰고 있는데도. 예약한 벤은 오질 않고 사무실에 앉아 옥수수를 먹는 친구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사랑스러움은 꼭 표정이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었던 거야. 냄새와 분위기에서도 얼마든지 사랑스러움이 묻어 나올 수 있었던 거야. 심지어 나는 옥수수를 볼에 딱 붙인 채 셀카를 찍었더라고. 이 날 하룬 그 옥수수가 루앙 보다 더 기억에 남았던 거지. 옥수수가 전부였던 하루였어. 옥수수 때문에 대차게 웃고 평범한 하루가 몸에 꼭 맞게 행복했는데, 2년이 지난 지금도 우린 그때처럼 깔깔깔 웃는다는 거야.  


라오스 첫 여행 때 오라버니도 옥수수를 내밀었거든. 오라버니가 툭 내민 옥수수를 반가운 마음에 잡아 들고는 쉬지 않고 오물거렸어. 나는 옥수수를 좋아해서 자리에 앉으면 삶아 놓은 옥수수를 모조리 먹을 정도였거든. 친구는 옥수수를 좋아하지 않는 애였어. 그런데도 그가 준 옥수수를 들고는 인상을 쓴 채 벤이 왜 안 오냐고 툴툴 거리며 옥수수를 먹었던 거야. 그런 친구가 재밌다는 듯 여직원은 웃는 눈을 하고 옥수수를 입으로 가져가며 친구를 바라보고 있어.


장황한 설명 없이 그저 툭 내미는 마음들이 있잖아. 가식도 겉치레도 계산 없이 던지는 마음 말이야. 눈에 띄지 않아서 찬찬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마음들이 있었어. 그가 내민 옥수수가 오라버니가 내민 옥수수가 왜 이렇게 유별나게 마음에 남는지 알 수가 없어. 어쩌면 그들은 기억하지도 못할 일을 나는 내내 마음에 두고 옥수수를 떠올려. 재미있었던 친구의 표정까지. 꾹 참았던 화가 터져 나왔을 때 느닷없이 내밀던 옥수수 하나에 우린 한참을 웃었어. 마치, 별일이야 있겠어. 너희를 루앙에 데려다 줄 벤은 곧 올 거야. 걱정 말고 여기 옥수수나 먹어, 하던 특유의 여유로움에 우린 한국말로 떠들면서 옥수수를 먹었어. 화를 가라 앉히고자 번뜩이는 잔머리로 내민 옥수수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는 그녀의 그 옥수수 덕분에 화는 가라앉고 우리는 두고두고 꺼내봐도 모자라지 않는 하루를 가진 거야.


사실, 그 때 말이야 우리 앞으로 벤 하나가 막 떠나고 있었거든. 그 벤은 아마도 우리를 태우지 않은 채 출발했던 거 같아. 다음 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상황이었던 거지. 그런데 마침 날도 너무 좋고, 여우 같이 옥수수를 내민 여직원이 밉지 않았고 옥수수가 쫀득하게 잘 익어 너무 맛있었거든. 게다가 둘이 마주 보고 앉아 옥수수를 먹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잖아.


다 괜찮은 그런 날들이었어.

하루가 고역 같은 이에게 옥수수 하나의 기억이 오늘을 살게 하는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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