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잠시 두고 온 여행지에선 두고 온 삶을 다시 챙겨 보기란 쉽지 않다. 비엔티안은 두고 온 '삶'을 드려다 보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곳이었다. 여행지는 여행지일 뿐이지, 라던 마음이 어느새 사라져 버린 자신을 무심코 발견했던 것은 여기 비엔티엔에서였다. 잠깐 스친 이의 표정에 녹아든 삶을 다 알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젊은 여자의 얼굴에 번진 권태와 강변식당에서 농담을 주고받던 젊은 청년의 삶이 궁금해지고 말끔한 차림 뒤에 감춘 어느 호텔리어의 뒷 이야기가 궁금했다. 시작과 마침의 교착점이었던 비엔은 여행지라기보다는 '삶'과 더 가까웠는데, 나는 그마저 싫지 않았다. 한 번쯤 가볼 만한 사원 몇 군데와 사진 찍기 좋은 빠뚜사이, 야시장과 메콩강을 마주 보는 강변 식당 외엔 딱히 갈만 한 곳은 없어도 어쩐지 정감이 가는 곳이었다. 오히려 빽빽한 '삶'들로 채워진 비엔이 여행지로만 머물지 않아서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비엔에 오면 J와 나는 더는 할 일이 없다는 듯 지루할 만큼 빈둥거렸다. 비엔에서 제일 비싼 호텔에서 지금까지는 그래 왔던 적이 없었다는 듯 뜨거운 물에 보란 듯이 몸을 구석구석 닦고 바삭한 소리가 기분 좋은 침대에서 늑장을 부리며 슬슬 기어 나와 기억에 남을 만한 조식을 먹었던 날, N에게 대뜸 전화를 걸었다.
"여기, 조식이 끝내주는데 와서 먹어요"
"어휴, 난 또 뭐라고, 자고 있는데 끊어"
핀잔을 들은 것보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에 한숨이 푹푹 나왔다.
조식을 턱까지 차오르도록 먹고 비엔의 거리를 걸었다. 느리고 지루한 걸음걸이. 익숙한 길목과 모퉁이를 지나면 메콩강 주변이다. 자석에 이끌리듯 이미테이션 물건을 파는 작은 스토어에 들어가 새로 들어온 짝퉁이 얼마나 진짜처럼 놓여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며 미처 감추지 못한 어설픈 흔적 찾기에 시간을 보낸다.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를 매의 눈처럼 살피고는 돌연 양말과 라이터(N을 위한)와 마그네틱 골라 나온다. 걷는 게 지치고 발바닥이 피곤해질 때쯤 검색도 잊고 눈에 띄는 마사지샵에 들어가 발마사지를 받고 아마존에 가서 커피를 주문한다. 비엔의 야시장 맞은편에 자리한 아마존은 우리가 자주 갔던 단골 카페였다. 아니, 단골 카페라기보다는 무언 갈 기다리게 되는 상황이 오면 우린 항시 그곳에 갔다. 그것은 주로 약속된 시간과 N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엔간 구석에 박혀 쪽잠을 자기도 했던 곳이기도 했는데, 나는 우리의 형편없는 쪽잠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마도, 거기였을 테다. 조식으로 배를 두둑이 채운 날 정처 없이 걷다 아마존에 앉아 N에게 연락을 취했던 곳이. 마침 N은 라면을 먹기 위해 물을 올리던 중이었다.
"같이 먹어요!!! 라면"
조금 지나 답이 왔다.
"라면 먹을 거면 와"
계획에 없던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고, J가 당황한 채 일어섰다. 툭툭이를 타고 라면을 먹으러 N의 집으로 향했다.
"큰 수영장이 보이면 내려"
툭툭이와 오토바이, 자동차들이 어지럽게 스친다. 온 얼굴을 덮는 바람을 맞으며 큰 수영장을 찾기 위해 연신 눈동자를 굴렸다. 큰 수영장이 보여도 그것이 큰 수영장인지 알 턱이 없는 우리는 툭툭이 기사 덕분에 큰 수영장 맞은편에서 내렸다. 눈을 마주친 J와 저게 어떻게 큰 수영장이냐며 낄낄거리던 찰나 우리를 향해 차 한 대가 섰다. 퉁명스러운 N이다.
"타"
큰길을 지나 구불구불 길 사이로 층이 낮은 아파트들이 깔려 있다. 삶을 일구는 사람들이 나갔다가 들어오는 집들 사이에 N의 집이 있었다. 내 집이라고도 내 집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집. 그 집을 에워싼 외로움과 고독을 남몰래 본 날 나는 그를 더 귀찮게 하리라, 마음먹었다.
N은 우리가 먹을 라면을 끓였다. 작은 냉장고에서 먹고 남은 콩나물을 깨끗이 씻어 잘 끓어오르고 있는 라면에 넣는다. 콩나물 특유의 시원한 맛이 라면 국물에 베일 테다. 아삭한 콩나물과 쫄깃한 면발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룰 터. 배는 불렀지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콩나물을 넣어 짜지 않고 시원한 맛이 도는 라면을 신 김치와 함께 먹은 것을 시작으로 서너 번을 더 N의 집에 갔다. 주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이었다.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짐을 정리하고, 딱히 갈 곳이 없으니 집에 가서 좀 쉴 요량으로 가서는 서로 딴짓을 했다.
딴짓을 멈추지 않은 N이 작은 냉장고에서 점점 삭아가던 김치를 좀 볶아 달라고 했던 날, J는 어깨를 으쓱대며 팔을 걷어붙였다. 처음으로 '짐을 정리하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했던 날이다.
"내가 또 김치는 맛있게 볶잖아요!"
숭덩숭덩 김치를 잘라 기름을 두른 팬에 김치를 살살 볶다가 설탕을 두르고 마지막에 참기름과 깨소금을 뿌려주면 완성되는 밥반찬.
J 옆에서 기웃거리던 N이 예상치 못할 말을 던졌다.
"김치를 씻지도 않고 그냥 넣었어?"
"김치를 왜 씻어요?"
처음 N의 집으로 라면을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처럼 J는 당황했다.
"안 씻으면 짜지"
김치를 씻어야 한다는 N과 김치를 왜 씻냐는 J와 귀여운 논쟁이 시작되었다.
싱거운 논쟁은 금방 끝나기 마련이었고, 어쨌든 씻지 않고 볶은 볶음 김치가 완성됐다. 나는 손가락으로 윤기 나는 김치를 집어 입속에 넣었다. 필요 이상의 오버스러운 맛 표현은 이럴 때 꼭 필요하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는.
“뭐야~ 짱 맛이잖아!!!”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가며 몇 번을 더 집어 먹으니 단호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만 먹어"
여행자보다는 현지인 더 많은 마트에 가서 비어라오를 사고 역시, 여행자보다는 현지인이 더 많은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마치 옆동네에 놀러 온 것처럼 익숙하고 편안해져 갔다. 비엔은 그렇게 지극히 평범한 하루가 쌓인 곳이었고, J와 N만으로도 꽉 찬 곳이었다. "거기서 뭐했어?" 물어오면 딱히 할 말이 없는 곳. 기대에 차서 물어 오는 물음에 그럴 듯 한 답을 찾지 못하고 아무것도 안 했어. 대답하는 게 꽤 만족스러울 거 같아, 그걸로 충분한 비엔티엔이 그래서 더 정감이 갔고 평범함이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절대 들키지 않을 같은 비밀을 가진 기분이었다. 우린 그곳에서 잠깐 살았을 뿐이다. 몇 번의 짧은 하루하루가 모이는 시간 동안 '여행'의 특별함을 지우고 평범하게 걷고, 살다 왔다. 일종의 김치를 볶는 거와 같은. 작은 것들을 크게 누리며 그저 우리의 평범한 시간들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싶어 애달팠을 뿐이었다.
삶이 곧 여행이지. 평범한 삶조차도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써내려 갔던 곳. 한번 쓰고 나면 흥미를 잃어버리고 마는 액세서리 같은 스페셜한 하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니, 사소하게 김치를 볶았던 일이 가장 큰 추억이 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가져올 수 있었던 평범하고 대범했던 우리의 비엔티엔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왓타이 공항에서 J가 N이 보내온 메시지를 읽는다.
"J야, 볶음 김치 너무 맛있다. 잘 먹을게, 고마워"
여느 때 보다 따뜻한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