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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Sep 19. 2023

집채만 한 옷장이 생겼으면 좋겠어

wave to earth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나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었다. 잡생각이 많아서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과 눈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책에 대한 내용은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책을 읽게 된 두 가지 사건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교장 선생님은 책과 줄넘기가 아이들을 성장시킨다고 생각하셨다. 교장 선생님이 계신 3년 동안 매주 한 학년씩 돌아가며 교장실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을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아이들 중 하나였다. 교장실은 넓고 쾌적했으며 아이들 두 명은 거뜬히 앉을 널찍한 소파가 있었고 무엇보다 유리병에 든 사탕을 먹을 수 있었다. 유리병 안에 든 사탕은 캐빈디쉬 앤 하비의 과일 맛 사탕이었다. 그 맛이 너무나 달콤했던 나머지, 사탕이 아주 얇아질 때까지 소중하게 녹여 먹었더랬다. 교장 선생님은 간혹 책을 열심히 읽는 아이에게 사탕을 하나씩 더 주시곤 했다. 그래서 나는 재미가 없어 하품이 나오는 개구리 신체에 대한 과학책을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며 완독 했다. 결국엔 세상 제일 달콤했던 사탕을 먹기 위해 책을 읽었지만, 덕분에 나는 1년 동안 100권을 읽고 1층 복도에 족자가 걸렸다.


  초등학생 때야, 책이 얇고 글씨가 크니 책 한 권을 완독 하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중, 고등학교를 지나 성인이 될 때까지 읽은 책은 초등학생 때 읽은 책에 1/3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사탕이 없었던 탓일까, 사탕이 세상 제일 달콤하기엔 너무 커버린 탓일까. 어쩐지 고등학생을 지나는 과정에서 소설을 읽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박혔다. 소설이 재밌는데, 정작 읽어야 하는 건 <체르노빌의 목소리>나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등 입시를 위한 책들이었다. 생기부에는 소감까지 썼지만, 사실 끝까지 읽지도 않았다. 이때 책은 공부 같았다. 책을 멀리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대학에서 휴학을 하고, 정말 남는 게 시간뿐이었을 때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책을.


  <요리코를 위해>, <공허한 십자가>, <백의 그림자>, <종의 기원>, <검은 꽃>, <지구 끝의 온실>, <시선으로부터,>, <원통 안의 소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말하지만>, <너무 한낮의 연애>,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일기>, <므레모사>, <방금 떠나온 세계>, <지구에서 한아뿐>, <얼마나 닮았는가>, <다섯 번째 감각>…


  기억을 더듬어 적어보면 이런 책들을 읽었다. 대체로 SF소설인데,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좋다. 이때 SF장르를 처음 알았다. 처음 발을 들인 장르에, 달콤함이라곤 사탕이 전부였던 그 시절의 아이처럼 지루한 줄도 모르고 책을 읽었다. 읽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사람처럼 유난을 떨기도 했다. 아마 알았던 것 같다. 앞으로 내 삶에서 이만큼이나 책을 많이 읽을 날은 없을 것이란 것을.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책을 읽고 있다. 여전히 읽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읽어야만 채워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채워지는 느낌이란 무엇인가,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원래 삶은 그런 주관적인 느낌으로 이루어진다.


  그래도 채워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이런 것이다. 세상은 말없이 살 수 없고, 친절하고 다정해야 할 부분들은 넘쳐난다. 나도 그 틈에 섞여 괜찮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들여 알아야 한다. 독서란 남의 인생과 생각을 빌려 입는 것이다. 내가 잘 가꾸면 옷장은 계속해서 커지고, 옷의 렌털 기간도 길어진다. 집채만 한 옷장에 꽉 들어찬 다양한 색과 재질의 옷들이 나의 채워짐이다. 마지막엔 그렇게 모은 수많은 옷들을 하나로 멋지게 리폼한다. 그리고 남은 옷들은 또 다른 누군가에 나누어준다. 지금 나의 옷장에는 겨우 몇 벌의 옷만이 걸려있다. 열심히 채우고 또 나눠주기 위해 읽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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