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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재 Aug 06. 2024

레프

'오늘인가'

레프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방 안의 고요함을 깨뜨리는 알람 소리. 어쩌면, 이 고요함을 깨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이불 밖으로 다리를 내밀었다. 침대 옆에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를 신고 방문 옆 스위치를 켠다. 방문을 열고 샤워장으로 들어간다. 화장실의 적막함은 레프에게 달갑지 않다. 그의 귀에는 고요함이 더 시끄럽게 들린다. 고요 속에서 그는 언제나 무방비 상태다.


샤워실 거울과 바닥은 검붉은 얼룩으로 덮여 있었다. 이제는 치우는 것도 귀찮다. 어차피 곧 다시 더러워질 테니. 그는 웃는 법을 잊었다. 웃음을 위해 필요한 근육은 현실 앞에서 약해졌다. 거울 앞의 사람이 누군지 잊어버린 지 오래다. 샤워기의 물은 마치 레프의 무거운 어깨를 바닥으로 짓누르는 듯했다. 오늘은 또 다른 결전의 날이다. 그는 3일 동안 치밀하고 은밀하게 준비했다. 이 계획은 누군가의 내일과 오늘을 바꾼다. 물론, 레프의 생각이 개입된 건 아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만든 것도, 죽음을 선사한 것도 결국 레프였다.'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그 죽음은 선인가 악인가.' 레프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그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해 괴로워한다.


2024년 2월 18일, 새벽 1시 15분. 맨해튼 123 거리. 높이 30피트, 고도, 습도… 모든 것이 레프의 예상대로다. 그는 차를 몰고 타깃 지점 근처 도로에 도착했다. 차를 세우고 내린 뒤 트렁크로 향한다. 트렁크를 열고 저격용 총이 들어있는 가방을 꺼낸다. 라이플과 배율기를 확인하고, 가방을 닫는다. 적막한 새벽 도로를 가로질러 저격 위치인 호텔로 향한다. 밖의 고요함과 달리 호텔 안은 현란한 불빛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관심이 없다. 평범한 금요일 밤 풍경이다. 레프는 잠시 동안 그 평범함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지 실감하며, 묘한 고립감을 느낀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로비로 향한다. 군중 속 레프는 직원에겐 그저 손님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레프는 정장 바지와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서류 가방을 하나 들고 있다. 그는 캐주얼 복장에 맞지 않게 검은색 비니를 쓰고 있다. 직원은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지만, 빨리 체크인을 하고 싶은 마음뿐인 것 같다. “방을 예약했는데요” 그는 미리 목 주위에 음성 변조 스티커를 붙여놨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스위로” “확인되셨습니다. 1203호입니다. 체크아웃은 내일 오전 11시입니다.” 체크아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겐 1시간의 시간만 있으면 되었다. 호텔키를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호텔 지하는 금요일의 밤임을 느끼게 해 준다. 레프에게는 이보다 좋은 시간은 없다. 마치 세상이 레프의 살인을 돕고 있는 듯했다. 그는 이 상황에 약간의 아이러니와 불편함을 느낀다.


레프는 호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12층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자, 다시 적막함이 그를 휩싸았다. 레프는 생각을 억누르려 애쓴다. 생각은 임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어떤 의문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저 이 새벽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두려움과 긴장감이 밀려온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호텔방으로 걸어가면서 몇 명의 투숙객을 만난다. 그들은 새벽이 길었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표정은 어떨까 잠깐 생각하는 순간 1203호 방 앞에 도착한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방 안을 수색한다. 전등 뒤, 침대 소파 밑, 화장실, 벽. 수색을 마친 뒤 바로 창문으로 향한다. 창문 밖은 금요일 밤 맨해튼 거리가 펼쳐져 있다. 창문 앞에 자리 잡은 레프는 야간 투시경을 꺼내서 1km 떨어진 타겟 지점을 살펴본다. 금요일 밤이지만 그 거리에는 인파가 없고, 도로 위엔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다. 신의 축복인지, 레프의 능력인지 이젠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는 손목시계에 시간을 본다. 1시 35분. 작전까지는 10분이 남았다. 가방에서 라이플을 꺼낸다. 라이플에 소음기와 배율을 장착한다. 책상을 가져와 위에 저격 양각대를 놓고 그 위에 라이플을 놓는다. 준비는 끝났다. 레프는 자신의 침착함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도 느낀다.


‘난 그저 의뢰인의 부탁을 따른 것이다. 그저 의뢰가 살인이었을 뿐. 회사원은 직장에서 맡은 일이면 무조건 해야 한다. 회사원처럼 나 또한 돈 주고 의뢰받은 일은 무조건 해야 한다. 그들과 다른 것은 없다. 그게 살인일 뿐. 머리를 비우자. 타겟에 집중하자.’


타겟이 움직인다. 타겟 지점까지 앞으로 500m. 레프는 정장 차림에 올백 머리를 하고 있는 타겟이 동종 업계 사람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새끼손가락에 일루미나티 문양이 그려져 있는 금반지. 떳떳한 걸음걸이.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한 보폭. 주위 환경에 곤두서있는 듯한 시선. 400m. 300m. 하지만 아마 모를 것이다. 자기가 죽였다고 생각한 사람이 의뢰한 총에 맞을 꺼라고는. 레프는 누군가가 실수할 때 방해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이 레프가 항상 승리하는 이유다. 요동치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다. "흡.. 하.......... 흡... 하........" 200m. 100m. ‘지금’


레프의 오른손 검지가 방아쇠와 친분을 쌓는 순간, 레프의 어깨는 라이플의 반동을 견딘다. 총알은 그들 품을 떠나 타깃 앞으로 나아간다. 어둠의 적막 속 금요일 밤은 총알의 소음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실버 불렛은 그렇게 타겟의 머리를 관통한다. 레프는 마지막까지 쓰러져 숨이 멎은 타깃을 렌즈 속으로 살펴보며 여느 때와 같이 사망 선고를 내린다. 그는 안도감과 허무함을 동시에 느낀다.


‘2024-02-18 01시 51분 13차 임무 완료. 엑스트레이션 컴플리트’


“미션 클리어했습니다. 잔금은 말씀드렸던 곳에 지금 바로 보내시면 됩니다. 저의 서비스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앞으론 편안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의뢰인의 눈물이 수화기 속에서 흘러나온다. 그건 살인에 대한 죄책감도, 타겟에 대한 연민도 아니었다. 그건 자신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사이렌의 목적지는 오늘의 죽음일까, 과거의 흔적일까. 레프는 관심이 없다. 호텔 방의 고요는 그에겐 생각의 블랙홀이었다. 


‘살인자의 살인은 선일까, 악일까?’ 레프는 생각했다. ‘살인자의 죽음이 살인의 연결 고리를 끊는 것일까? 미래의 살인을 현재 청산하는 것이 옳은가? 살인은 여전히 살인이다. 하지만 살인자에 대한 살인은 선이 될 수 있을까?’ 그는 고민에 빠졌다. ‘그런 살인자를 죽인 나도 결국 살인자인가? 그렇다면 나도 언젠가는 죽겠지. 그것이 선의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겠군.’


언제나 그 끝엔 질문만이 남는다. 레프는 오늘도 일을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한다. 그는 방에서 자신과 관련된 모든 흔적을 지우기 시작한다. 창문 앞에 놓았던 책상을 다시 제자리에 둔다. 저격총을 분리하여 가방에 다시 넣는다. 방을 수색했을 때 떨어졌을 자신의 DNA를 역추적하여 흔적을 제거한다. 내일이면 청소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생길 수 있는 꼬리를 미리 잘라버린다. 어쩌면, 이것이 레프가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든 루틴일지도 모른다.


흔적을 다 지운 그는 침대 위에 호텔키를 두고 방에서 나온다. 방에서 나온 그는 군중 속을 뚫고 바로 호텔을 나온다. 호텔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호텔 건너편에 세워둔 차로 간다. 트렁크를 열어 가방을 숨겨 두고 맨해튼 123 거리를 피해 집으로 돌아간다. 반대편 차선에선 경찰차가 레프를 스쳐 지나간다. 


집에 도착한 레프는 바로 샤워를 한다. 총에서 나온 화약과 살인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또다시 고요는 그를 잠식시킨다. 허겁지겁 핸드폰에서 음악을 튼다. 그 순간 한통의 문자가 온다.


'의뢰하겠습니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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