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기억을 깨우고 색은 오감을 자극한다.

무쇠 뚜껑 속의 비밀

붉은 노을이 차창 너머로 터질 듯 흘러내렸다.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핸들을 돌려 저무는 태양을 따라 달려 멈춘 곳은 고요한 강변이었다.

패딩을 꺼내 걸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보았다.

한참을 걷다 문득, 들키고 싶지 않은 서러움이 흘러내렸다.

빛은 기억을 깨우고 색은 오감을 자극한다.

우리의 감정과 마음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때로는 오래 잊고 있던 추억을 살며시 끄집어낸다.


과수원 집 외동딸로 자라던 유년 시절, 나의 기억으로는 연초록의 아오리사과와 가을 부사가 익어가는 끝없이 펼쳐진 과수원 너머 서산으로 붉은 태양이 넘어가려 할 때쯤,

일을 하다 말고 저녁밥을 지으러 엄마는 밭에서 콩을 한 움큼 뽑아 오신다.

우린 옹기종기 콩을 까면 엄마는 쌀을 씻어 아궁이에 불을 피운다.

보글보글 밥 끓는 소리가 나면

무쇠 솥뚜껑을 열고 밥 안개 같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달큼하고 고소한 밥 냄새가 우리의 침샘을 자극할 때 흰쌀밥 사이로 엄마는 스테인리스 공기를 조심스레 놓기 시작하신다.

그 속에는 호박, 감자, 파, 고추가 어우러진 고동색 된장과 파를 쏭쏭 뿌린 부드러운 연노란색의 계란찜이 자리 잡았다.

엄마는 연초록의 어린 호박잎과 깻잎을 하얀 쌀밥 위에 얹고 뚜껑을 덮고 나면 바빠지기 시작한다.

장작불 속에서 익어가던 먹음직스러운 고등어가 갈색으로 익어가면 엄마는 마지막으로 참기름, 들기름을 바른 뒤 맛소금으로 간을 한 구멍 뚫린 검푸른 돌김이 마지막 장작불에 구워져 밥상에 오르면,

나는 큰소리로 수저를 놓으며 “아빠, 식사하세요!”

젊은 엄마의 등 뒤로 붉은 해는 서서히 넘어가고, 아빠는 저물어 가는 태양을 넓은 등에 지고 마루에 앉으시면, 가족들은 아무 말 없이 둘러앉아 묵묵히 밥을 먹는다.

밥을 다 먹고 나면, 말없이 외등을 향해 몸을 던지는 나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안 가득 숭늉을 머금고 손에는 눅눅한 누룽지를 들고 자연스레 마루 옆에 놓인 네 다리로 지탱된 문짝이 있는 흑백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어 기억에 없는 바보상자를 보았다.

그 작은 흑백 화면 속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던 시간이야말로 뒤늦게 깨닫게 된 가장 소중하고 따뜻한 순간이었다.


그 시절, 시골집임에도 전기밥솥이 있었고 전화기도 세탁기도 있었지만 엄마는 늘 장작불로 밥을 지으셨다.

정성과 손맛이 가득한 엄마의 밥상은 단순한 끼니를 넘어서 너무 소중한 아무도 훔쳐가지 못하는 나만의 보물이 되었다.

이 오감의 추억은 온전한 행복의 순간으로 남아, 삶이 힘겨울 때면 마치 숨겨둔 도토리를 꺼내듯 마음을 달래는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에는 상상 이상의 차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창 너머로 새벽빛이 푸르스름하게 비춰오던 시간, 나는 소독약 특유의 냉랭한 냄새 속에서 길고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병원 복도를 홀로 걸어야 했다. 가끔 그 기억 속의 어린아이는 아직도 꿈속에서 헤매며 나를 울게 만든다.


네 살 때 전신화상을 입고 병원 생활을 시작했다.

몇 년에 한 번 찾아오는 대수술은 내가 20살이 될 때까지 반복되었다.

그래서인지 옛 대구 동산 병원 앞에 서면 지금도 여전히 병원을 무서워했던 그 시절의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불안함이 엄습해 온다.


그러나 스물여섯이 되어 결혼하면서, 그 모든 슬픔과 불안은 더 이상 나를 붙잡지 못했다. 너무나 사랑하는 남편과의 결혼, 그리고 스물일곱에 큰아이를 품게 되며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사진작가의 꿈을 접고 생계를 위해 결혼사진과 가족사진을 찍기 시작했으며, 이후 웨딩샵을 운영하며 뷰티 산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진작가로서 유랑하며 그냥 사는 것이 꿈이었는데 돌이켜 보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퀘란시아'는 아닌 삶의 도피쳐를 선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현실 속에서 나만의 길을 개척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의 두 아들은 어느덧 스물세 살, 스물다섯 살의 멋진 청년으로 성장했고 남편은 여전히 내 옆에서 사랑보단 의리로 각자의 삶을 응원한다.

그동안 나는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가장 찬란한 시간을 보냈다. 이젠 또 다른 장이 시작된다. 5막 1장

2025년 1월 1일 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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