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도'를 보다가 디테일에 빠지다
'강연'하는 강사와 '강의'하는 강사는 같은 '강사'인가?
<부제 : 영화 '사도'를 보다가 디테일에 빠지다>
엄청나게 유명한 강사가 있다. 소위 명강사라고 불리며 한 회에 수백만 원의 강사료를 받는 스타 강사다.
어느 날 치과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강연초대를 받았고 참가한 수백 명의 치위생사에게 이렇게 인사를 했다.
지금껏 취위생사의 자부심으로 열일 해왔던 그 분들은 정말 '안녕' 했을까?
2015년에 개봉했던 이준익 감독의'사도'라는 영화 초반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많은 신하들이 어린 세자에게 유가(儒家)의 『십삼경(十三經)』 중 하나인 효경을 강론하다 그만 꾸벅하고 졸음에 빠진 세자. 이에 신하 한 명이 "효경을 알면 잠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저하"라고 하며 손에 물을 묻혀 세자의 얼굴에 뿌려 잠을 깨운다.
이렇게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것을 '강연'이라 하는데 나는 문득 그들의 '강연'이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강연'과 같은 의미인가? 하는 쓸데없는 물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어쩌면 크게 필요하지 않을 또 대다수가 관심이 없을 ‘디테일’에 다시 연연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임금이나 세자 앞에서 이뤄지는 강연(講筵)은 우리가 아는 강연(講演)과는 다르다.
일상의 강연은 '배우고 익힌 내용을 풀다(講:외우다. 배우다. 演: 펴다. 부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반면
조선시대 강연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임금이 배워할 내용을 진도에 맞게 전하는(講:자리, 좌석,연회)'의미를 담는다. TV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인과 일반인들이 무대에 서서 메시지를 전하는 그것이 바로 강연(講演)이다.
이렇게 두 단어를 비교하고 보니 다른 물음이 생겼다.
그럼 ‘강연’과 ‘강의’는 같은 의미일까?
사실 ‘강연 한다’와 ‘강의 한다’는 말을 혼용하고 ‘교육시간’이라는 말과 ‘강의시간’이라는 말을 섞어 쓰기도 하지 않은가? 이 단어들은 같은 뜻에 표기만 다르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의미가 아예 다른 것인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강연(講演)은 '배우고 익힌 내용을 풀다‘라는 뜻을 가지지만 강의(講義)는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굳이 따지자면 강연보다는 강의가 조금 더 본질적 의미를 가진다.
그럼 ’강의하는 강사‘는 적합한 표현인가?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지난 글에서 교육 대상자를 ‘청중’이나 ‘피 교육자’가 아닌 ‘학습자’라고 정의해야 함을 주장했다.
지난 글 [알쓸신잡] : https://brunch.co.kr/@18580/4
그러면 '학습'의 반대말 중 '교수'라는 단어를 가장 가까이에서 찾을 수 있고 그게 강사들의 정체성임을 알게 된다. 교수(敎授)는 ‘가르쳐서 준다’는 뜻으로 '교육'이라는 유의어를 가지고 있다.
교육(敎育)은 ‘가르쳐 육성한다’는 뜻에 ‘인격을 길러준다’는 의미를 포함한 단어로 역시나 '학습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이다.
이런 흐름으로 가보니 '강사'의 명확한 표현이자 올바른 단어로 ‘교수자’ 혹은 ‘교육자’를 꼽게 된다.
그러므로 강의하는 사람들은 결국 교육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실제로 ‘강의법’이라는 뜻만 봐도 ‘<교육> 해설 위주로 가르치는 교수 방법’으로 교육의 중요한 수단임을 알 수 있다.
결국 교육>강의>강연 으로 서열을 '굳이' 나눠볼 수 있다.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그냥 강의든 강연이든 잘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글쓴이가 이런 디테일에 목숨을 건 듯 구분하고 선을 긋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영화'사도'로 출발한 단어 정리의 시작점인 '강연'을 보자.
강연은 연설과 비슷한 의미로 '[명사] 일정한 주제에 대하여 청중 앞에서 강의 형식으로 말함'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강의와 유사하지만 '강의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스피치'따위의 의미이므로 궤가 조금 다르다.
정리하면 ‘교육’이라는 최종 목적을 위해 두루 사용하는 교수방법이 ‘강의’이며 그 연장선에 ‘강연’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
즉 강의는 교육이라는 거대 담론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적용하는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예~~~~뭔가 발견한 것 같아 기쁘다)
이처럼 강의와 교육은 그것을 진행 하는 방법론 관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강의든 강연이든 교육이든 잘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이건 어떨까?
토의(討議)와 토론(討論)을 구분하지 않고 토의할 시간에 토론하자고 제안하면 교육은 원하는 방향으로 닿지 못하게 되고 강사는 교수자로서 신뢰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조선시대에 왕을 높여 부르는 ‘전하’와 왕세자를 높이는 ‘저하’는 ‘ㄴ’받침 하나의 차이지만 그 의는 매우 다르다. (진짜 무시무시하겠지)
이렇듯 단어 하나가 갖는 고유한 의미는 ‘인식’과 ‘행동체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쉽게 간과하고 넘어갈 수 있겠는가?
대통령을 ‘각하’라고 하든지 ‘대통령님’이라고 하든지 법적으로도 또 상식적 소통으로도 문제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붙여 부르는 것에 담는 속 깊은 의미는 다르다.
강연을 하든지 강의를 하든지 크게 상관이 없다.
직업으로 강사를 하든지 강연가를 하든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무언가를 먼저 배우고 익혀 학습자에게 전하며 또 그것을 통해 학습자의 변화와 성과를 돕는 숭고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있다면, 작은 단어 하나에 담긴 큰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임하는 강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작은 바람을 담아 글을 맺는다.
이는 규정과 규칙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하는 자로서 ‘윤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뒤끝)
1. 이제 글을 다 썼으니 내일 있을 ‘교육’이나 준비하러 가야겠다.
2. 윤리라는 말이 갖는 의미가 궁금한 분들이 있다면 그 또한 디테일로 풀어볼 의향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