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머무는 집, 유기방 가옥

by miso삼삼

봄이 오면 산수유, 매화,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차례로 핀다. 그러나 올해 봄은 달랐다. 꽃들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피었다. 4월에 내린 폭설이 원인일 것이다.



산수유와 매화는 꽃망울을 터뜨릴 채비를 마치고 있다가, 개나리는 마침 제때, 벚꽃은 서둘러 꽃을 피웠다. 서슬 퍼런 날씨에 숨죽인 채 기다리던 백목련도 자신만의 필살기인 우아함을 한껏 드러냈다.




어느 날 마법처럼 온 세상에 꽃 잔치가 열렸다. SNS에는 연일 봄꽃 사진이 올라왔다. 그중 유독 내 눈길을 끈 곳이 있었다. 충남 서산에 있는 ‘유기방 가옥’이다. 사진 속 고택과 꽃들이 잘 어우러져서 마치 그림 같았다.



유기방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집이라 했다. 어떤 사람이 살았을까. 궁금함을 안고 친구들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꽃비가 내리던 화사한 봄날이었다.




유기방 가옥은 1900년대 초에 지어진 전통 양반 가옥이다.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배치된 구조는 고택의 품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사랑채는 사랑방에서 마루까지 한 공간으로 이어져 있고, 안채와 행랑채, 별채 등이 용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전통 한옥의 미학과 실용성, 자연 지형을 고려한 배치가 인상 깊었다.



이 고택은 충청남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학술적·문화적 가치가 높다.



이 집은 단지 오래된 건축물이 아니다. 살아 숨 쉬는 ‘집’이다. 유기방 가문이 대대로 거주하며 지역 양반가의 전통과 생활 문화를 이어온 살아있는 고택이다.



자연 지형을 살린 배치와 중부 지방 양반 가옥의 전형적 구조, 생활문화가 잘 보존된 점에서 조선 후기 주택 사의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유기방은 올해로 일흔일곱이다. 충남의 한적한 마을에서 유기방 가옥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는, 이 고택의 현 주인이다. 그는 서자로 태어나 집안의 중요한 행사, 이를테면 제사에는 참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장손이 고향을 떠나자, 대대로 내려온 고택을 지킬 이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삼십여 년 전, 그는 빚을 내어 이 집을 샀다고 한다. 서자의 손으로, 한 가문의 고택이 다시 일어선 것이다.



유기방은 손수 집을 고치고 다듬었다. 대나무 숲을 정리하고 그 자리에 수선화를 심기 시작했다. 수선화는 해마다 늘어났다. 마침내 십여 년 만에 고택 안팎 일만여 평을 가득 채우는 장관을 이루었다.


유기방 가옥은 충남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고, 봄마다 노란 수선화를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그는 여전히 고택을 지키고, 집안 제사를 주관하며, 선조들의 묘소를 돌보고 있다. 서자로 태어났지만 누구보다 집안을 아끼고, 누구보다 진실하게 가문의 흔적을 지켜온 사람이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고, 못난 자식이 부모를 섬긴다”는 옛말이 문득 떠오르는 이유다.



멋스러운 고택을 천천히 둘러보며, 이 집 안에서 나고 자라며 늙어갔을 사람들을 상상해 보았다.


새벽이 오면 “꼬끼오” 닭 울음소리에 잠을 깨고, 굴뚝에선 아침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람들은 소를 앞세워 논과 밭으로 나갔을 것이다. 주인 대감의 생신날이면 진수성찬을 차려 동네 사람들까지 불러 잔치를 벌였으리라. 평소엔 맛보기 어려운 귀한 음식을 먹으며, 모두가 모처럼의 횡재를 만끽했을 것이다.



고택은 생로병사와 희로애락, 대서사시가 펼쳐졌던 삶의 무대였다. 세월이 흘렀고, 사람들은 떠났지만, 이야기는 끊기지 않았다. 유기방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이 고택의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기품 있는 고택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장독대, 노란 수선화가 어우러져 봄날의 예쁨을 뽐내고 있었다.



유기방 가옥을 한층 더 빛나게 해 준 야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란 수선화가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살랑바람이 산 위로 불어올 때마다 노란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초록빛 소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 그 아래 노랗게 흐드러진 꽃동산은 마치 수채화 속 풍경 같았다.


이 아름다운 봄날, 유기방이 지켜낸 고택과 그 안의 모든 시간들이 다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서산 유기방 가옥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수선화를 보면서, 러시아의 드넓은 평원을 노랗게 수놓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던 영화 닥터 지바고였다. 시베리아에서 라라를 찾아 돌아오던 지바고가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에 한가득 피어있던 노란 꽃 사이를 걷는 장면은 숨을 멎게 했다.



모리스 자르(Maurice Jarre)의 서정적인 음악이 수선화밭의 평화로움과 아름다움,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의 쓸쓸함을 극적으로 끌어올려주었다. 노란 수선화밭은 그들의 애절한 사랑이 피어나는 벅찬 공간을 상징했다.



동시에 러시아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을 지키려 애썼던 지바고의 아내 토냐의 슬픈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의 사랑이 점점 멀어져 가는 아픔, 역사적 혼란, 가족의 안전과 생존에 대한 불안 등 토냐의 절망적인 심정이 헤아려져 억장이 무너졌다



남자 주인공 오마 샤리프의 우수에 젖은 깊은 눈빛과 노란 수선화의 물결은 오랫동안 나를 설레게 했다.



서산 유기방 가옥 수선화 꽃동산에서 나는 지바고와 라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추억했다. 이곳에 피어난 수천 송이의 노란 수선화는 러시아의 평원을 닮아 있었고, 봄날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허망함을 동시에 말해주고 있었다.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더 아름다운 사랑, 지나갔기에 더 짙게 남는 봄. 유기방 가옥의 수선화 언덕은 그 모든 것을 고요히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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