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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뻥쟁이글쟁이 Feb 23. 2024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공문서 위조죄~쉿, 특급비밀이야.

30대 후반, 상무 아닌 술상무라도 되는지

출장도, 접대도 많았던 남편은 얼굴 보기도 힘들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얼굴  잊을만하면 가뭄에 콩 나듯 정말 어쩌다

 한 번씩 일찍 들어오다 보니  무기한  하숙생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귀가시간이  자정을 넘기는 건 예사였고  서너 시간

잠깐 눈 붙이고는 다시 출근을 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신데렐라 유리구두도 아니고 12시 땡 하기 전 까진 그럭저럭  참고 기다리지만  자정을 넘기는 동시에

 나름 작전개시에  돌입했다.

스케치북 한 장  북~찢어 뻘건 색 매직으로 개발새발 크게 휘갈겨 며  머리에서는 스팀이 활활  

타오르는 그림까지  첨부했다.

밤귀신이랑 더는 못 사니 다시는 나를 찾지 마시라~

냉장고 문에  척 붙인 후 침대 옆  바닥에

납작 엎드려  숨어보기도 하고  베란다나 장롱  안,

 세탁기 안에도 숨어지만 결론은 술래도 없는 숨바꼭질 놀이를 나 혼자 하는 셈이었다.

마누라가 없어졌는지, 찾지 말라는 메모가 붙었는지 조차도 모르는 눈치빵점 남편은 들어오기 무섭게

 냅다 코를 골아댔다.

남 속 타는 것도 모르는 주위 사람들은 숨바꼭질 얘기를 들으며 박장대소를 했다.

오밤중에 그러고 싶냐, 니넨  참 재밌게 사는구나..

밤귀신이랑 살다 보니  나도 덩달아 밤귀신이 되어가며

홀랑 날밤 까는 건 다반사였다.

애꿎은 시계만 노리고 째리며 언제 들어오나.

벼르고 있는 대신에 집안가구를 수시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날 한 작업이 조금이라도  맘에 안 들면 만사 제치고 다시 옮겨야만 직성이 풀렸다.

가출한다는 메모술래 없는 술래잡기 놀이에도 탱크가 진격하는 코골이로  일관하던 남편이 크게 당황하는 게 보였다.

이게 내 집인가?  아닌가? 술에 취해 잘못

 찾아든 건가,  헛것이 보이는 건가??

부스스한  눈을 껌벅이며 정신줄을 잡으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드는 모습이 숨어 혼자 보기

아까울 지경이었다.

아이구 요거 효과있네...놀래키는 재미에 푹 빠져

몸이 부서져라 수시로 옮기는 것에 전념했다.

장롱도 번쩍번쩍,  분명 안방에  짱 박혀 있던 것이

  어떤 날은 다른 방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소파는 말할 것도 없고 냉장고며 식탁이며  티브이위치도 수시로 둔갑을 시켰다.

제 다르고 오늘 또 다르니  날마다 새로 이사 온 집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막달의 임산부 시절에는  옆방으로 이사 간 장롱을

다시 원위치시키고자  이삿짐 직원을 부른 적도 있었다.

몸이 안 따라주니 남의 손을 빌려서라도 기어이 옮겨야만 속이 후련함을 느꼈다.

내 안에  이런 소질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며  이 김에 이삿짐 센타라도  하나 차려 타고난 소질계발해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들었다.

잠을 자려 누워 있다가도 천장을  바라보며

구상을 하는 동시에 어느 자리가 맘에 안 든다 싶으면 바로 실행에 옮겼다.

 자는 아이들  이 방, 저 방으로 살짝

안아다 옮며  온 집안 바닥이 긁히거나 말거나 

 질질 끌고 나르는 극성을 떨었다.

잠들기  봤던  가구배치가 일어나니  달라진 모습을

 보던 남편이  그만 좀 옮기지. 어떤 땐 화장실 가려다가도  헷갈리더라.. 하길래 아주 잠깐 작업을 멈추기도 했다.

무거운 거 번쩍번쩍 들다 다치면 뒷수발은 자기 몫이라는 둥, 남에 집 온 거 같아 낯설다는  둥

 야금야금 잔소리를 하길래  그래, 다치면 나만 손해지..

하는 생각도 잠시.

야간작업은 중단하고 남편이 없는 낮시간에만 노가다에 전념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숨바꼭질에 이어 이삿짐 놀이도 시들해질 즈음,

한동안  제자리에서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하던

우리 집 가구와는 달리  밤귀신 남편의  술타령은

 일 낌새도 안보였다.

 곤드레만드레 상태에서도 집구석은  정확히

 찾아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 맘껏 부어라 마셔라 해 봐라.

인심 쓰듯 포기하고  기다리던 어느 날 들어오는 동시에 목이 쪼이는지 넥타이만 풀어  던지고는

 침대에 대 자로  뻗어서 괴성을 뿜어냈다.

푸어 푸어 드르르르릉...크어어엉..헉..

탱크소리도 모자라 가끔은 숨을 안 쉬기도 해

저러다 그냥 가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앞섰다.

어깨 짓눌리는 가장의 무게를 견디느라 이

아침  출근길은 변함없으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밤 12시에 만나요 브라보콘 같았다.

남들은  7시 땡 하는 소리에 귀신같이 들어와

 땡칠이라고도 놀리  현관 앞에 놓인 신발만 봐도 밥 줘... 하는 것 같아  짜증이 난다고 푸념을 하는데

우리 집 밤귀신은 너무 늦게 다니는 게  제일

큰 불만이었다

내 사전에 밥 굶겨 내보내는 건 절대 용납 못하는데

하루는  정말 큰 맘먹고  술고래 괘씸죄를 적용해

밥을 안 주기로 마음먹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밥 소리도 못하고

 눈치 슬슬 슬그머니 나갔던 날도 아니나 다를까, 곤드레만드레 나는 취해버렸어..

술독에 빠져 살기로 작정을 했는지  나갔다 하면

술에 쩔어 귀가를 했다.

하루아침 거른 날,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앞차를 들이받고 싶더라 ...하길래 그다음부터 으로,

깡으로  굶기는 건 패쓰!

어느 날인가는 정말 죽겠는지, 못 일어나겠던지

흔들어 깨우니  아파서  출근 못 한다는 전화를 대신  좀 해달는 어이없는 요구를 했다.

아니 , 내  품 안에 자식도 아니고 남편이여 남에 편!

어지간히 퍼 마시지  쪽팔리게  뻥치는 거나 시키냐...

거품을 물었더니  머쓱해서는  다시 눕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조금 지나자  무슨 무전 치는 소리도 아니고

아, 아... 마이크 실험 중 모 그런  것도 아니고

암튼 요상한 소리가 들리길래  촉각을 곤두세웠다.

흠 흠...음...요보@@  @@@@

대체 몬 상황인가 싶어 방문 살짝 열어보니

 술은 덜 깼지, 후유증으로 목은 잠겼지. 혀는 꼬였지...

여보세요 라는 발음도 안돼 요보제요 요보째요

흠 흠..전화기에 대고  숙취 생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 방문 살짝 다시 닫아주고는

배를 움켜쥐고 배꼽 빠지도록 웃었다.

여보세요가 안돼 요보째요 라니.

어설픈 발음에  누가 속아  넘어 갈까 싶었다.

말 배우기 시작하는 시기도 아니고 술의 힘 대단해요!



뭐든  처음 시작이 어렵지  길  트기 무섭게 수시로

핑계를 대며 반나절이 지나서야  출근하는 배짱만

나날이  늘었다. 병원을 들른다고도 했고  몸이 안 좋다고도  했는데 변명도 핑계도  그때그때 달랐다.

핑곗거리 만드느라 머릴 짜낼 망정 나름 원칙이 있었는지  절대 아이들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지 않았다.

But.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대망의 그날은  민방위 훈련이라고 과감하게

뻥을 친 후  개운하고 뽀송뽀송하게 하루를 날로 드셨다. 이때껏 그래왔듯이  묻고 따지는 사람 없이

당연히 그냥 넘어갈 거라 예상했는데  저녁 늦게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 당시  전무님이  다음 날 출근할 때  민방위통지서

필히 지참! 이라는  엄명을 내리셨고 남편은 고민고민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새벽동이 트기 무섭게  서둘러 출근하는 남편이 이상했지만  전 날  야무지게  올 땡땡이쳐 그러나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맨 정신으로 일찍 귀가한 남편은  신나고

즐거운 일이 있었는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내가 말이야..로 시작되는 사건의 전말을 듣다 보니

진짜 기발한 사기꾼이구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사건 수습을 위해  일찍  출근했는데  사무실 주변 인쇄소도  다 문을 열지 않은 상태라  학교  앞으로  찾아가  문방구 쥔한테 사정사정해 민방위  용지  양식을 복사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다음 코스는  더 완벽한 증거를 위해 도장

새기는 곳을 찾아 민방위 교육 직인까지 만들어 꾹

찍어 주는 센스를  발휘하셨다니  오!놀라워라

감탄에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래서  다들 속아 넘어갔냐 재 확인하니 우쭈쭈

더 신이 나서는 전무님 왈;

넌 거짓말 같은 진짜가 참 많다...라고 했다던가.

매번 속을 때마다 긴가민가 하던 차에 공문서 한방으로 뒷덜미를 잡으려 했는데  직인까지 찍힌 용지 앞에

그 누가 태클을 걸쏘냐 싶었다.

이건 진짜 잡혀가 콩밥이나 드실 범죄행위 이다 보니

아무한테도 입도 뻥끗 못하고 쉿, 절대  발설불가에 특급비밀로  반평생 숨겨둔 사항이었다;

백만 년도 훨씬 전 일이다 보니 공소시효도 끝난 지 오래고  아무에게도 말 못 했던 사건의 전말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사기 치다 걸리면 콩밥 드십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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