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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뻥쟁이글쟁이 Sep 16. 2024

1호!

없는 집 네 자매 중  맏이로 산다는 것

단칸방을 벗어날 무렵, 1호와 2호, 그리고 3호인 내가 오랜 세월 한방을 쓰며 자랐다.

어마무시한 욕을 거침없이 쏟아내던 욕쟁이 할머니가

지어 준 별명처럼 낄끔하고 암팡지고 야물딱진 1호는

없는 집안의 살림 밑천답게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하는 억척을 떨었다.

여자가 고등교육까지 받았으면  많이 배운 것 이라며

몬 놈에 얼어 죽을 대학이냐는 주정뱅이 아버지를 한방에 이겨내는 쾌재를  불렀다.

보란 듯이 하고 싶은 것을 다 이루었고  첫 주자가 스타트를 잘 끊었으니 밑으로는 술술 자동이었다.

부유한 환경에서도  딸이라는 이유로 못 배운  내 엄마의 숭고한 희생이 뒷받침 해 준 결과물이기도

했다.  움켜쥐고 절대 내놓지 않는 깍쟁이 짓을 하면서도 동생들 뒷바라지에는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내 기억  한 켠의  소중한 추억 또한  절대

1호를 빼 놓을 수 없을 만큼 감사한  존재였다.

청계천 통로에서 팔던  고로켓이란 걸 처음 맛 보게

해 준 것도 1호였고, 경양식 집의 돈까스를. 양 손으로 자르던   칼질이며  광화문에 죽~~늘어서 있던 금강제화나 엘칸토에 데리고 가 여학생 구두를  사

 안겨 주던 것도 역시 1호였다.

어쩌다  한 번 해 주는 단발성이 아닌, 구두가  닳아

즈음이면  매번 불러 내어 신데렐라 유리구두 버금가는 귀중한 걸  발에 신겨주었다.

그 뿐이랴, 광화문 네거리의 국제극장이며  단성사,  피카디리  등을 데리고 다니며  명화에 버금가는  영화도 수시로. 보여주었다.

1호가   취직을 하면서  첫 월급으로 산 물건이  바로

전축이란 것  이었는데  클래식판을  얹으면 바늘이 살포시 돌아가면서 아름다운 선율을 쏟아 냈다.

모 말라 죽은 깡깡이 소리냐는  엄마의  한숨과 한탄이

무색하게   웅장하면서도 고운 음색이 내 사춘기 시절을  곱게 물 들여 주었다.

집안의 모든 일에  우선적으로 나서며 싫은 내색없이

뒷바라지 해 주던 내 1호 언니!


어떤 상황이었는지  내가 고등학생일때  1호와 껄끄러운  사건이 있었는데  3년 내내  서로 말을 안 하고 지내던 시간이 있었다.

새벽 별 보고 나가  어두워서야 들어 오던 고딩과 출퇴근에 쫒기는 직장인이었으니 부딪칠 일이 거의

없던 관계가  지속되었다.

어쩌다 부딪치면 철딱서니  시절인 내가 먼저 쌩까며

무언의 투정을 일삼았다.

소 닭 보듯  멀뚱거리면서도 속으로는 내 자신이 몹시  화 나 있고   불편한 상황이란 걸 숨기지 않았다.

그 당시 1호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암튼

나 혼자 호도독거리며  더 쌀쌀맞게 굴었던 것 같았다.

누군가 내게 겨울바다의 겨울 바람보다 더 차고 멀게 느껴진다던 얘기를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잊지 못 하는 걸 보면  못 돼  처 먹었단 느낌이 앞섰다.

배은망덕도 유분수라고,  중고등시절을  헌신적으로 수발 해 준  1호에게  뭐가 그리 서운했던지  좀처럼

꼬라지난 심통을 거두지 않았다;

어느 날 ,결혼을 한다고 반듯하게 고루 갖춘 예비형부가

인사를 올 때까지도  그냥 그런가 보다,  시집을 가려나 보다..하는 느낌이  다 였다.

함이 들어 오던 날,   왁자지껄  동네 골목이 떠나가도록  구멍 난  오징어를 뒤집어 쓴 함잡이의 실랑이를 보며 잠시 즐거운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가시는 걸음걸음 사뿐이 즈려 밟고 가소서. 라는 싯귀가 딱  어울리게  발 걸음 마다 봉투가 자리잡았고

그때마다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곱고 가녀린 한복차림의 1호가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잠시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나쁜것은 다 날리는  액땜의 의미라며  문지방에 놓였던  바가지가  와자자작 뽀개지는 소리를  끝으로  5호와 나는 계란 한판을 삶았다.

계란의 몸값이  귀하던 시절이었으니 만큼 김장 속만 따로 버무려 새콤하게 익은 것에  계란후라이를 늘 1호에게만  대령했었다.

노른자에  참기름  툭 떨군 후라이와 잘 익은 생채는

 돈 버는 1호에게만 베푸는 엄마의  특혜였다.

그것에 한 맺힌 3호와 5호가  잔칫날을 틈 타 과감하게 계란 한판을 훔치는 공범이 되었다.

부엌 쪽문 골목에 앉아  둘이 뽀약뽀약  몇 개나

까 먹었나  먹은 것  보다 남은  것이  한눈에도 훨씬 많아 보였다.

잔치가 끝날 무렵 5호는 슬그머니 방으로 사라졌고

늦은 시간, 난 1호의 요청에 부응하느라  오랜 시간 장벽이었던  얽힌  실타래를  푸는  중 이었다.

정확히는 기억에 없지만 내일이면  시집을 가고 없으니 서운했던 거 풀고  좋은 관계로 지내자는  얼추

그런 대화가 오갔던   화해의  장 이었다.

욕심 내 훔쳐먹었던 계란으로 인해  밤 새 똥물까지 토해내던 5호는 1호의 결혼식에 불참하였고

닭냄새인지  신물이 넘어 오는  불쾌감으로 인해

난 그 후로 계란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1호의 부재와 더불어 집안이   텅 빈 듯한 느낌이었고

의지할데가 없어져 버린  스산한 날이 이어졌다.

신혼 집 정리를 마친 1호의  초대에  2. 3. 5호가

 틈만 다면  발이 닳도록  청량리 행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대여섯 시간을 달려  도착한  소도시의 간이역에 마중나온 1호와 형부가  환한 표정으로 새벽을 비추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조카가 태어나자  산후조리를 하느라 한달 간  친정으로 오게 되었는데 밤 새 울어제끼던 삐약이를 얼르고 달래는 건 내 차지였다.

혹여 산모가 깰까 싶어 눈 비비며 눈치빠르게  우유병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어느 순간 잠에서 깨었던 1호가  갓난쟁이를  안고

앉은 채로  꾸벅꾸벅  잠 든 내 모습을 보았던지 평생을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20대 처녀가 신생아 케어에 똥기저귀 갈아주던 것에 대한 고마움을 수시로 표현하며 상기시켰다.

일 하는 엄마를 대신 해 친정에서의 불편함이 없도록

나 또한 진심으로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나자 둘째조카가 태어났는데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마친 1호의 산후조리 역시 묻고 따지고 할 것도 없이 내   담당이었다.

2호도 시집가고 없는 상태였고  그 시대에는 간병인의 개념도  없던 때라 가족외엔  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입원  소식을 듣는 동시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일주일 휴가를 내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서너살 큰 아이는 5호가 맡았고 난 꼼짝마라 신세가 되어 병원에 갇혀 지냈다.

내 핏줄,  내 형졔니 당연히 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조카들이 태어남으로써 보이지 않는 끈끈함으로 연결되어 더 돈독해지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내가  수십번의 맞선을 거칠때마다  먼 발치에 숨어서

염탐하던 것도 1호였고  늦은 나이에  하는 결혼을 큰 기쁨으로 여기던 것도 역시 1호였다.

아이들이 커 가는  모든 과정에 가장 가까이서  함께 하는 일엔 언제나 1호가  선두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느 덧 같이 늙어가는 처지이다 보니. 자랄때보다 더 애틋하고  자주 보고 싶은 관계가 형성되었다. 남 하고 어올리는 것과 달리 언제 보아도   편안하고  만만하고  어떠한 허물도 덮어 줄 수 있는  전우애 같은  것이  불끈 솟아 오르는 느낌이었다.

어느 해 가을인가, 강화에 놀러가기  위애   만났는데

다음 날 건강검진이라는 말을 꺼냈다.

밴뎅이회에 비빔밥을 정말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보고 헤어졌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묻는 말에나 간신히 오는 단답형 톡을 보던 일주일이 지나 조카를 통해 알게 된 사연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니던 병원에서  늘 그랬듯이 가뿐한 마음으로 건강검진을 했는데 보호자를 찾더라며  큰 병원에

 가 보라는 소견서를 써 주더란다.

간암이나  췌장쪽이 의심된다는 청천병력  소리와 함께

바로 ㅅㅇ 대 병원으로 향했고 정밀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중 이라고 했다.

그 길로  쏜살같이  가 1호를 들여다 보니  반 시체모냥 넋이 나간채로 허깨비가 움작이듯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쇼파밑에 전기장판을 깔고 누워있는 1호를 쇼파 위에

 앉아 바라보자니 자동으로  눈물이 쏟어졌다.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시절을 함께 자라 온 내 핏줄이

감히 맞설수도 없는 병마와 싸운 단 생각을 하니 서글프고 화가 났다

절대  이길래야 이길 수도 없는  죽음의 게임 같은 거.

왜 하필 내 언니에게...

힘 빠진 목소리로 그간의 일을  얘기하는 모습에  행여 눈물을 들킬까 봐   눈을 마주 할 용기가 없었다.

운 좋게   바로 예약한 대형병원을 가고 초죽음이 되어 정밀검사를 하고  어디 부위엔가 구멍을 뚫어 시술을 받고  결과를 기다리 는 중 이라고 했다.

자포자기 체념 상태의 촛점을 잃은 눈으로 간신히 말을 이어가는데  어떠한 위로도 해 주지 못 했다.

가냘프게 흔들리는 어깨만 바라보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이었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된 결과에 한층 밝아진 1호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 되었다며  제법 생기가 돌았다.

질병분류번호 c16,  D37. 위장관기질종양

췌장이나 간 쪽이 아닌  위장관의 근육층에 생기는 듣보잡 기스트 암 이라고..소회기계에서 발생하는 희귀암 중  하나로  약물치료로 가능한 암 이라며  추적검사로 관리가 된다는  불행 중 천만다행 희소식이었다. 글리백이라는 약을   장기복용 해야

하며 면역력과 체력저하가   잇따르지만

그렇게 지내는 지가 어느 덧 2년차가 되었고 그나마 합병증이라고 한다면 피부가 뽀얗다 못해 하얗게 변하는 증상이 지속되었다.

눈이 많이 부어 때로는 낯선 느낌도 들지만 아무렴 어떠리. 눈 앞에 존재하는 내 핏줄이 감사하고 고맙단 생각이 먼저였다.


어울리며 때론 서운한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예전의 언니가 아니란 생각에  어느 순간 먼저 배려하게 되고 더 많이 이해하려 애 쓰는 버릇이 생겼다.

자랄 때  기억엔  몇년씩 상처 주며  모른체도 했으나 이젠 모질게도 못 하겠고  말 한마디.라도 더  조심하게 되는 습관이  쑥쑥 자라고 있다.

그냥 옆에서 오래 오래 같이 지낼수 있는 것 외에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으랴 , 욕심 낼 수 있으랴!

얼마 전 m일보에 글이 실리게 되어  얘기를 하던 중

갱이야,  내 얘기 써도 돼, 나 소재로 삼어 봐

하던  말이 생각 나  문득 쓰게 된  1호 이야기!.

이름 놔 두고 언제나 애칭으로 갱이야... 불러

주는  내 언니가 오래오래 내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과 욕심을 담은  1호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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