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독자의 머나먼 소풍 길

가는데 순서 없다더니~

by 뻥쟁이글쟁이

옛 날 옛 날 아주 먼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쯤의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인 듯싶은

용인 양반가의 내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유학을 마친 엘리트였다고 했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신사복차림의 훤칠하고 멋진 분 옆에 쪽진 머리와 더불어 고운 한복차림을 한 내 할머니 모습이 보였다.

두 분 사이에 낑겨있던 너댓 살 정도의 사내아이 역시 신사복 차림에 머리는 포마드를 발라 싹싹 빗어 넘겼는지 부자지간 같은 모습이었다.

풍금을 배경으로 한 평안한 가족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시대의 안정된 일상이

고스란히 묻어니왔다.

후에 할머니나 엄마한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할아버지가 소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고도 했고, 세상 남부러울 것 없는 단란한 가정이었다고 했다.

그런 좋은 시절도 잠시, 내 아버지가 다섯 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원인도 모를 병으로 세상을 등지자 남겨진 사람을 마중하는 건 황량하고 쓸쓸한 일상이었다.

헛헛한 눈빛으로 동구밖을 지키던 사내아이는 오지 않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버릇이 생겼고 음전하고 곱던 사진 속 여인네는 피폐해진 삶과 더불어 꼬장꼬장함에 사나움만 더해 갔다.


인물 좋은 내 아버지의 사진 한 장으로 덜컥 혼인을 결정한 외할아버지 뜻에 따라 *씨 가문에 시집온 엄마의 파란만장한 삶이 서막을 열던 시기였다.

2대 독자였던 아버지는 일찌감치 외로움을

벗 하며 자란 탓인지 인정은 많고 결단력은 없고 아무한테나 막 퍼 주는 인심만 후한 성품이었다.

좋은 성격만큼이나 술을 너무 좋아한 탓에

실수도 잦다 보니 번듯한 직장도 밥먹듯이 짤리는 상황이 이어졌다.

아이구 웬수같은 인간, 술 독에 빠져 뒤지라는 소리를 자주 접한 내 기억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곤드레만드레 취한 날이면 중요 서류봉투는 뒷전이었고 술 냄새만 앞세우는 주정이 이어졌다.

같은 소리를 백만 번쯤 하는 것도 모자라

한창 단잠에 빠져있는 자식들을 깨우는 게 으레 습관이었다.

1남 4녀의 막내인 5호는 가장 어리니 그나마 열외인 듯싶었고 3대 독자 4호는 호랑이 할머니가 끼고 있으니 섣불리 깨운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두세 살 터울인 1.2.3호가 주로 만만한 콩떡이었는데 자다 불려 가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있다 보면 눈은 스르륵 자동으로 감기고 발이 저려 그런 고역이 따로 없었다.

어서 이 상황이 끝나 다시 잘 수 있기만을 간절히 소망하며 코에 침을 세 번 찍어 바르다 보면 어느새 발 저림이 멈추곤 했다.

주정이란 게 주요 핵심은 없고 사방으로 튀는 침에 술 냄새에, 중간중간 끄윽 끄어억 하는 추임새가 대부분이었다.

살림 밑천 우리 첫째 딸 어쩌구 저쩌구,

애비 닮은 순한 우리 둘째 딸 어쩌구 저쩌구.

아이쿠,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우리 이쁜 셋째 딸 어쩌구 저쩌구,

어느 복 터진 놈이 우리 셋째 딸을 데려가려나 등등등...

긴 긴 시간 동안 이어지던 주정은 자는 애들 깨워했던 소리 반복하지 말고 어여 고꾸라져 자라는 엄마의 한탄과 한숨이 섞인 진두지휘하에 끝날 수있었다.

그 와중에도 주머니마다 뒤적거리며 습관처럼 꺼내주던 술에 쩌든 돈이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

귓가에서 맴 맴도는 셋째 딸 어쩌구 ...

아이쿠, 이 나이 되도록 내가 치를 떨 만큼 싫어하던 게 바로 소리였다.

대여섯 살이나 먹었을까, 몬 선도 안 보고

뭘 데려가고 ..;

우 씨, 고약한 술 주정에 이은 입 방정로 인해 훗 날 서른 번쯤의 맞선과 맞닥뜨린 건 아닌가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약스런 할머니를 가진 덕에 네 자매를 향한 기집년들 소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라는 동안의 차별과 서러움은 이루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의 내 어린 시절 잔혹사였다.

수시로 비수가 되어 가슴에 콱 콱 박히던

염병할 년, 급살 맞을 년, 썪어 문드러질 년 등의 무시무시한 욕을 듣고 자란 덕분인지

어지간한 것에는 눈도 껌벅 안 하는 강심장으로 자랐다.

그래서 다들 내게 간뎅이 큰 년이라고 놀렸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눈물에도 인색했다.

두어 살짜리 잠든 4호를 넘어갔다는 이유로 어디 기집년이 귀한 3대 독자 훌렁훌렁 넘어 다니냐며 등짝 후려치던 매서운 손 길도

지워지지 않는 악몽이었다.

말 끝마다 기집년들 소리를 시작으로 듣기조차 어마무시한 육시랄 년,

귀신이 잡아가다 놓칠 년, 호랑이가 물어 갈 년...욕에 있어서만은 울트라 나이쑤 캡짱 아무도 넘보지 못할 만큼의 강력한 선두였다

그런 할머니 벽장 안엔 3대 독자만을 위한 온갖 주전부리가 꽉 꽉 채워져 있었는데 넘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했던지 경첩에 수까락을 푹 꽂아 넣고 감시를 했다.

어느 날인가 마실 다니러 간 할머니의 벽장을 노리던 2호와 3호가 각설탕이며 깡통 속 과자를 훔쳐 먹다 걸린 날,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는 할머니를 따돌리는 두 언니의 혀가 메롱하며 뱀의 혓바닥보다 더 길게 나와 있었다.

우물가를 빙빙 돌며 붙잡으려 애쓰는 마음과는 달리 몸이 안 따라 주다 보니

궁시렁 궁시렁 온갖 욕을 총 출동시켰다. 마지막에 내뱉은 말이 아이고 저 주리를 틀어 죽일 년 들, 귀신도 안 잡아갈 년 들이었다.

잡아가다 놓치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지겨우면 아예 안 잡아가겠냐며 그 욕을 듣는 두 언니의 까르르 합창이 우물가에 울려 퍼졌다.

빠다에 간장과 참기름을 듬뿍 넣어 고소한 냄새 폴폴 풍기며 4호에게만 먹이던 치사한 밥숟가락과 더불어 친구들이 담벼락에서 **야 놀자, 이름을 부르는 날엔 기집년이 모자라 보태러 왔느냐며 아낌없이 욕을 퍼부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4호가 놀다 얻어터지고 들어오는 날에는 드센 기집년들 틈에서 기를 못 펴고 자란 탓이라며 눈을 흘겨 댔다.


3대 독자 4호가 열 살이 되던 해에 파란 병에 하얀 위장약 암포젤 엠을 달고 살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정작 치마폭에 쌓여 응석받이였던 4호는 할머니귀신이 보인다며 수시로 울어재끼는 쪼다 짓을 했다.

만화가게에 빠져있던 내게 전 날, 놀자며 이름을 부르다 욕만 배터지게 먹은 친구가 니네 할머니 죽었대...알려주는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는

느낌이었다.

좁은 골목 세개를 지나는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웠고 제발 꿈이 아니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겅중겅중 날았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응석받이가

공부에만 전념하는가 싶더니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가고, 명문대 입학을 하고...

졸업 후의 탄탄대로가 펼쳐질 즈음 결국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할머니 표현대로 근본도 없는 기집년의 꾐에 빠진 것인지 방 안의 지 물건을 빼돌려 어느 구석진 산동네에 살림을 차렸고 호적에서

파 버리느니, 다시는 눈에 띄지 말라느니 하는 극한 상황이 벌어졌다.

어디 취직했다는 소리만 들리면 엄마를 선두로 1,2호까지 합세해 직장까지 쫓아 가 뒤집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뼈 빠지게 공부시켜 놨더니 엄한 년 좋은 꼴은 못 본다는 개떡 같은 명분이었다.


그 길로 4년여 년 발길을 뚝 끊은 4호를 기다리느라 엄마는 밤늦게까지 현관을 바라보았고, 혹여 문이 닫힐세라 쓰레빠로 고정시키는 일상을 거듭했다.

문이 항상 열려있으니 아무 때고 들어오라는

일종의 신호였다.

수북이 담은 밥그릇을 이불속에 항상 묻어 놓았으나 식은 밥을 꺼내는 다음날이면

깊은 한숨도 같이 꺼냈다.

그 정성이 통했을까, 어찌어찌 몇 년 만에 돌아온 4호는 빼짝 마른 몰골의 중증환자가 되어 있었다.

보기도 아까울 만큼 훤칠한 3대 독자 인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두 눈만 퀭~하니 시커멓게 변해 사그러들기 일보직전이었다.

스트레스성 당뇨로 700대 수치를 돌파하면서 수차례 입원을 하고 죽을고비를 넘기고...취직하는 족족 찾아 가 훼방을 놓은 것이 결정타였던 것 같았다.

손발을 묶어 버렸으니 무슨 재주로 버티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무기력한 몸과 마음에 얼씨구나 병마가 덤빌 수밖에... 그 상황이 되어서야 쫓아다니며 직장을 떨궈냈던 세 모녀는 서로 니 탓, 내 탓하며 변명들을 늘어놓았다.

손 귀한 집안에 아들만 내리 둘 낳아 준 마누라는 수십 년 병수발에 지쳤는지 바람이 나 가출을 해 버렸고 아들 손에 이끌려 다니며 치료받던 귀하디 귀한 3대 독자는 온갖 합병증과 더불어 살다 먼 길 소풍을 떠난 지 어느덧 2년차에 접어들었다.

그곳에선 할머니 엄마 아버지 다 만나 잘 지내고 있으려나...

3대 독자가 예고도 없이 가장 먼저 왔다고

다 들 놀라시는 거나 아닌지...

이만큼 살아보니 인생이 결국은 잠시

머물다 가는 소풍 길은 아닐런지.

언젠가는 다 떠나게 되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디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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