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에, 머슴에 금지옥엽으로 유년시절을 보낸 내 엄마는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오면서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게 되었다.
그레고리펙 수준급의 인물 좋으신
아버지 사진에 외할아버지의 뜻이 결정한
참담한 결과였다.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 우 하는 게 아니라 먹구름이 몰려오듯 평~생을 집어삼켰다.
본인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로지
좋은 집안의 자손이라는 이유와 잘 생긴 외모가 한몫 톡톡히 했었던 것 같다.
살아내는 동안 틈틈이 부르짖던 내 엄마의
한 맺힌 절규가 그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생긴 것이 밥 먹여 준다니,
낯짝만 뻔지르르해야 아무 소용없더라 .
서방 잘못 만나 평생을 지지리 고생만 한다는 등등...
외삼촌 두 분이 그 시절 S대 법대 출신인 것에 비해 여식이라 공부도 시키지 않은 건 둘째치고 사진 한 장에 덜컥 결정하신 외할아버지 탓으로 돌려야 하려나.
원망과 한탄을 해야 하려나.
내 인생 돌리도..
몰락한 양반가에 시집오던 순간부터
온실 속 화초에 버금가던 내 엄마의 고추당추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데다 고약함을 가미한 눈칫밥에 부뚜막 신세를 면치 못 했다.
첫아들을 낳으며 잠시 구박이 주춤하나 싶었지만 귀하디 귀한 3대 독자의 명이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두 돌을 넘길 즈음 급체로 깔딱깔딱 숨이
넘어가는 아이 앞에서도 거침없는 욕을 퍼부으며 몰아붙였다.
어린것 건사도 못한 등신 천치도 모자라 졸지에 새끼 잡아먹은 ㄴ 이 되어버렸다.
온갖 구박과 설움 속에서도 억척을 떨며 내리 딸만 낳아 키우는 매 순간순간이 외로운 삐에로 신세였다.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하는 온갖 고생에도 구박과 욕설은 그치지 않았고
내리 딸만 셋을 낳는 바람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집년들 소리를 달고 살았다. 첫아들의 쥭음 이후, 다시 3대 독자를 낳았는데 할머니의 손에서 내리질 않아 둥둥 떠 받들며 모시고 살았다.
우야둥둥 귀한 대접을 받았음에도 나약한 응석받이로 자라는 것에 화가 났는지
드센 기집년들 탓이라며 매몰차게 굴었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던 시기였을까, 할머니가 저 세상 가는 동시에 지긋지긋한 시집살이도 끝낼 수 있었고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시절이기도 했다.
시모상을 치르는 내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던 엄마의 얼굴에는 모처럼 희망의 빛이 보였다. 눈은 웃고 입에서만 앵무새 노래하듯 흥겨운 가락이 흘러나왔다.
내 기억 속 40대의 엄마가 어느 날 집안 예식에 다녀오더니 부스럭거리며 봉다리를 풀었다. 그때는 몰래, 아주 살짝 싸 들고 다녀도 묵인하던 때였는지 주로 떡종류가 대부분이었는데 검은 봉지 안에서 까.꿍..하며 나타난 것은 뜻밖의 정체였다.
빠다에 볶았는지 고소하고 맛있더라...며
몰래 싸 왔노라고 했다.
싸 오기로 맘먹었다면 떡이나 다른 종류도 많았을 텐데 기껏 고개 내민 나물에 어이가 없었다. 누가 이런 걸 싸들고 다니냐며 주둥이 댓 발로 나와 투덜거렸다.
명색이 잔치 집 다녀오는 손에 분명 다른 걸 기대했을 텐데 거무죽죽한 게 축 축 늘어져
나 잡아 잡수..;하는 나물종류라니!
홀깃 한번 쳐다보고 심통 부리는 입에 손으로 집어주던 그 맛은 씁쓰름하고 떨떠름하고 정말 쓰다는 느낌뿐이었다.
너도 내 나이 돼 봐라,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런 맛을
좋아할 날이 올 꺼야 ..;
남에 손 빌려 해 주는 음식으로 자란 탓인지 , 그냥 그냥 대충대충인 성격 탓인지 살림에
꽝이었던 엄마를 가진 덕에 아기자기한 밥상은 사치였다.
나물 종류나 여러 종류의 반찬은 먼 나라 이야기였고, 벌겋게 볶은 덴뿌라나 기름에 들들 볶은 김치가 대부분이었다.
보온도시락도 없던 시절, 혼식 장려 하던
때에 깡보리 한 귀퉁이를 비집고 벌그적적 물 들어있던 그것을 마주하자면 삭은 밥
인 듯, 먹다 남은 찌꺼기인 듯 밥맛이 싹 달아났다.
수시로 마주하던 덴뿌라 반찬 때문인지
오늘날 각양각색의 자태를 뽐내는 오뎅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총각김치 또한 듬성듬성 잘라 허옇게 버무린 탓에 식욕이 사그라들기도 했다.
선명하게 뻘건 색의 새콤한 맛을 떠올리다 보면 입안에 침이 고일 정도인데 간신히 고춧가루만 슬쩍 스치고 지나간 정도였다.
어려운 살림 탓에 귀한 고춧가루를 아끼기 위함인지는 알지 못하던 철부지 시절이었다.
점심시간에 마주한 다른 아이들 총각김치는 빨간 옷 뽐내며 너울거렸으나 우리 엄마 껀 맛이 없구나 하는 느낌이 다였다.
.뉸으로 보는 맛도 있으니 새빨갛거나 혹은 새콤하게 익어야 자꾸 손이 갈텐데
손에서, 입에서 하염없이 거부를 했다.
내 가정을 꾸리며 만들어내는 내 총각김치 에는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새콤하고
시원한 맛이 담뿍 묻어났다.
어려운 시절의 허연색이었던 엄마표 김치를
아낌없이 빨갛게 물들여 주었다.
대가족임에도 김장을 넉넉히 못 하던 엄마가 어느 겨울 모처럼 큰맘 먹고 백 포기를 들였는데 이유인즉슨, 밑 부분에 깔린 거라 좀 싸게 파는 모양이었다.
배추만 싸게 샀지 고춧가루는 금값이었고 엄마특유의 고달픈 레시피대로 뻘건 색의 칠갑을 두루진 못 했다.
김장을 하며 맛보던 김치에서 석유냄새가 진동을 했는데 혹여나 익으면 덜 하겠지,
안 나겠지 하는 바램을 완전히 박살 낸 채
익으면 익을수록 역겨움에 먹을 수가 없었다.
시장바닥에 누군가가 흘린 석유 때문인지
싸게 파는 사람이 있었고 그것을 알면서도 싸다는 이유로 샀으니 누굴 탓하랴 싶었다.
겨울 동안의 큰 먹거리였던 김치는 볶아도, 헹궈도 석유냄새가 진동을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김장철만 되면 냄새나던 김치와 더불어 평생을 동동거리며
고단한 삶을 살았던 엄마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 걸 떨칠수가 없었다.
그 시절의 맛있는 김치에 대한 기억이 없다 보니 난 이담에 엄마처럼 지지리 궁상으로 안 살꺼야를 거듭하며 지금의 내 김치맛은 최고 중에 최고로 자리잡았다.
양파와 무를 많이 갈아 넣고 각종 양념도 아낌없이 듬뿍, 고춧가루에 한 맺힌 거 모냥 새빨간 빛의 잔치를 벌였다.
한 번은 내 김장김치를 접했던 지인이 저 쪽 지방일 거라며 우기는 통에 민증을 까기도 했다. 주민번호 뒷자리가 첫 번째는 성별,
두 번째가 출생지 구분인데 난 바로오... 서울출생을 뜻하는 0이었다.
소금을 전혀 안 넣고 액젓으로만 간을 하다 보니 익으면 익을수록 곰삭은 맛이 나는 게
어릴 적 외갓집에서 먹던 그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대청마루에 앉아 법랑공기의 수북한 쌀밥과 더불에 두 그릇은 거뜬히 해치웠던 풍요로운 기억이었다.
어릴 적에야 씁쓰름한 맛에 기피대상이었던
취나물이 알고 보니 건강에 여러모로 이로운 식재료였다.
혈액순환에도 좋고 피로회복과 면역력에는 물론, 소화제 역할과 더불어 피부에도 좋은 팔방미인격이었다.
어디 식당에라도 가 혹여 이 나물이 니오면
두 접시는 먹어줘야 본전을 뽑는다는 기사를 보기도 했다.
며칠 전 외출했다 돌아오니 현관문 손잡이에 검은 봉다리가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풀어보니 야들야들한 새순만 다듬어 놓은 취나물에 돌미나리, 머우대에 이어 손바닥만 한 곰취가 봄내음 물씬 풍기며 저마다의 향기를 내뿜었다.
각각의 봉지 안에는 나물뿐만이 아니라
지방에 사는 동생이 정성 들여 가꾼 농산물을 수시로 보낸다며 이웃들과 나눔 하는 아래층
엄마의 정성도 가득 담겼다.
가장 먼저 취나물을 소금물에 삶아 건져 물기를 꼭 짠 후, 버터와 액젓 파 마늘 들기름을 듬뿍 넣고 조물조물 해 센 불에 휘리릭 볶은 다음 마지막단계에서 들깨가루를 솔솔 뿌려주니 고급진 맛이
물씬 풍겼다.
취나물을 마주 하는 순간,
빠디에 볶았는지 고소하고 맛있더라는 엄마 생각을 하며 어느 순간부터인지 취나물에는 꼭 버터를 추가하는 습관이 생겼다.
시금치는 달달하기라도 하지만 쌉싸름 해 가까이하지 않던 나물이 어느덧 내 최애 반찬이 되어버렸다.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수시로 사게 되는 취나물을 볼 때마다 엄마 생각도 같이 나는 건 그리움일까,
그깢 취나물이 뭐라고 몰래 봉다리에 숨겨 와 꺼내놓던 그날의 모습은 연민일까.
취나물에 젓가락을 대던 남편이 새삼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당신은 누구 닮아 나물을 이렇게
잘하는 거야?
누구한테 배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