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걷는 길 끝

누구나 그리움 하나는 묻고 산다.

by 지해랑

연화동에서 평생을 살아온 김 노인은 어느새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하루 일과라곤 동네 골목을 천천히 도는 산책뿐.
그러나 그 길 끝에는 언제나, 꼭 들러보는 장소가 있었다.

낡은 공중전화 부스.
손때 묻은 유리창, 반쯤 벗겨진 하늘색 페인트, 제 기능을 다한 지 오래된 듯한 전화기.
젊은 세대에겐 쓸모없는 흉물처럼 보일지 몰랐지만, 노인에게 이 부스는 묘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별무리동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 부스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생일날, 세상에 없는 사람한테 전화를 걸 수 있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근데 진짜라던데? 울면서 나온 사람들 내가 몇 번이나 봤어.”

노인은 그 말에 굳이 맞서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미소 지으며, 부스 옆에 놓인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보였다.
수화기를 든 채 울음 삼키는 사람들, 눈물을 훔치며 미소 짓는 사람들.
그 표정들만으로도 부스가 가진 힘을 알 수 있었다.

며칠 전, 노인은 특별한 장면을 목격했다.
젊은 여자가 부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반지가 쥐어져 있었고, 드레스 자락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눈가에는 분명 눈물이 맺혀 있었는데, 입술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노인은 그 미소를 오래도록 기억했다.
그건 단순한 웃음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오래 기다리던 축복을 받았다는 듯한, 깊고 단단한 웃음이었다.
‘저 아이도 이제 다시 살아가겠구먼.’
노인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노인의 기억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갔다.
젊은 남자가 수화기를 붙잡고 연신 “미안해, 미안해”를 외치던 날.
중년 여성이 한참 통화를 하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던 순간.
그리고 초등학생 아이가 부스를 나와서 “엄마 목소리 들었어!” 하고 소리치며 달려가던 장면까지.

그 하나하나가 노인에게는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각인되어 있었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은 떠나도, 그 부스 안에서는 여전히 누군가의 사랑과 그리움이 오갔다.


어느 날, 동네 젊은이가 물었다.
“할아버지, 그 부스는 왜 아직도 남아 있는 걸까요? 요즘은 다 철거하잖아요.”
노인은 잠시 부스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없애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지. 그게 필요한 사람들이 아직 있으니까.”

그 대답을 듣고 청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노인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부스를 다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필요할 때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고 가는 것뿐이었다.

이른 새벽, 노인은 다시 골목 끝을 지났다.
부스 안의 불빛은 희미했지만 분명히 켜져 있었다.
그리고 안에는 한 남자가 들어가 있었다.
넓은 어깨를 가진 청년.
그는 수화기를 붙잡은 채, 마치 세상 전부를 잃은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노인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태어나고 있구나.”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노인은 부스 앞에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도 또 한 사람이 위로를 받고 갔구먼.
내일은 또 다른 발자국이 이곳에 닿겠지.”

바람이 불어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노인은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부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곧, 또 다른 생일을 맞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월, 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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