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났던 첫사랑
윤호가 처음 은지를 뚜렷하게 기억한 건, 도서관 창가 자리였다.
그날따라 오후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길게 스며들었는데, 은지는 그 빛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스치는 햇살이 금빛처럼 빛나서,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눈에 박혔다.
그녀는 두꺼운 전공서를 펼쳐놓고, 펜을 입술에 살짝 대고 있었다.
윤호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은 이렇게 사소하면서도 선명했다.
며칠 뒤, 그는 일부러 같은 시간에 도서관을 찾았다.
은지가 늘 같은 자리에서 공부하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호는 한동안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그저 맞은편 책장에 앉아, 가끔 눈길을 훔치며, 그녀가 웃을 때 괜히 괜히 따라 웃는 것뿐이었다.
어느 날, 윤호는 책상 위에서 작은 메모지를 발견했다.
‘혹시 자리 맡아주실 수 있나요? 물 좀 사 오려고요.’
글씨체는 동글동글, 다소 급히 쓴 듯하지만 정갈했다.
윤호는 그 메모를 쥐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은지가 자신을 믿고 부탁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날 이후, 그들은 점점 말을 트기 시작했다.
“혹시 이 수업도 들어요?”
“네, 같이 들었는데..”
짧은 대화였지만, 윤호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중간고사를 준비하던 어느 밤,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도서관 문이 닫히자, 은지가 난처한 얼굴로 우산을 꺼내보았다.
우산 살대가 한쪽 부러져 있었다.
윤호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 같이 쓰실래요?”
그날, 두 사람은 같은 우산 아래 걸었다.
좁은 우산이라 어깨가 자꾸 부딪혔고, 빗소리는 두 사람의 침묵을 덮어주었다.
은지가 조심스레 말했다.
“윤호 씨랑 이렇게 걷는 거, 이상하게 편해요.”
윤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순간 세상이 다 물러간 듯했다.
그에게는 빗속의 그 짧은 거리가, 가장 긴 행복으로 남았다.
가을 축제가 열리던 날, 캠퍼스는 불빛과 음악으로 가득했다.
윤호는 친구들과 함께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은지를 만났다.
“같이 다닐래요?”
그 한마디에, 그는 친구들과 자연스레 떨어져 나왔다.
그들은 함께 노점에서 어묵을 먹고, 음악 동아리 공연을 보았다.
은지가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칠 때, 윤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꼭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다.’
불꽃놀이가 하늘을 수놓던 순간, 은지는 조용히 말했다.
“윤호 씨, 나 요즘 힘들 때마다 이 순간을 떠올려요.
같이 공부하고, 같이 웃는 시간들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윤호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좋아한다”는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괜히 지금의 평온함이 깨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졸업을 앞둔 겨울, 은지는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윤호는 병실 앞까지 갔지만, 문을 열지 못했다.
“괜히 부담 주면 안 되지.”
“혹시 내가 간다면 더 힘들지 않을까.”
그런 핑계들로 발걸음을 돌린 것이, 그의 가장 큰 후회였다.
그리고 며칠 후, 은지의 부고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장례식장에 흰 국화 한 송이를 내려놓으며 속으로만 말했다.
“은지야.. 사랑했어. 끝내 말하지 못했지만, 정말 사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