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단 말이 입에 먼저 붙은 이유

착함으로 무장한 불안의 언어

by 지해랑

나는 이상하게도
“안녕하세요”보다
“죄송합니다”가 먼저 나오는 사람이다.


생각해 보면, 이건 오래전부터 몸에 밴 습관이었다.
어릴 때 어른들 앞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무리 없이 지내려면 먼저 웃고, 먼저 사과하는 게 안전했다.

“네가 양보해야 싸움이 안 나지.”
“네가 먼저 미안하다고 해. 그게 어른스러운 거야.”

그렇게 나는
내 잘못이 아닌 일에도,
내 몫이 아닌 책임에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됐다.


미안은 방패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미안’은 진심일 때보다
방어기제일 때가 더 많았다.

누군가 화내기 전에 미리 사과하면
그들의 화살이 나를 비껴가니까.
오해가 생기기 전에 먼저 고개를 숙이면
나를 싫어할 확률이 줄어드니까.

미안은 내가 세상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앞에 내세운 방패였다.


그런데, 부작용이 있었다

문제는 그 방패가 나를 지켜주긴 했지만,
같이 나를 깎아내렸다는 거다.

‘내가 미안해야 일이 원만해진다’는 공식에 익숙해지다 보니
내 감정, 내 권리, 내 목소리는
늘 뒷순위로 밀렸다.

그러다 보니 진짜 잘못한 사람조차
내 사과로 안심하며 떠나갔다.
결국 나는, 내 존재를 조금씩 깎아 먹으며
관계의 평화를 유지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이렇게 한다

누군가 “이거 왜 이렇게 됐죠?”라고 물으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죄송합니다’ 대신
“어떤 부분이 불편하셨나요?”라고 되묻는다.
상황을 먼저 파악하고,
내 몫이 아닌 건 내려놓으려 한다.

처음엔 어색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마치 오래 붙여둔 딱지를 억지로 떼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틈으로,
내가 나를 조금 더 지켜주는 공기가 들어왔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 눈치 보며 괜찮은 척하던 나는,
사실 스스로에게는 가장 불친절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나부터 내 편이 되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 다짐한다.
아무에게도, 나에게도,
함부로 “괜찮아요”라고 말하지 않겠다.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매번 미안해하는 건
내가 나를 끊임없이 가해자로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이제는 이렇게 말해보자.
“미안해” 대신
“고마워”
혹은
“그럴 수도 있지.”

그게 꼭 무례해지는 건 아니니까.
그냥, 나도 조금은 편해지는 거니까.

수,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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