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감동 체험기
좁은 자취방에서 두 명이 함께 살던 대학 시절, 표지부터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를 만났고 강연을 통해 우리나라 1호 정리 컨설턴트 윤선현 님을 만났다. 그렇게 미니멀라이프의 씨앗이 삶으로 스며들었다.
대학생 때 <심플하게 산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버리고 사는 연습> 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미니멀리즘은 내 삶의 철학 중 일부가 되어갔다. <심플하게 산다>와 <버리고 사는 연습>이 미니멀리즘에 대한 마인드셋을 장착시켜준다면,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는 55개가 넘는 실용적인 방법으로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은데?'라는 당신의 질문을 말끔히 해소해 준다.
최근에는 미니멀 라이프에 관한 책과 넷플릭스에서 곤도 마리에의 영상을 보면서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철학이 서서히 다시 발아하기 시작했다. 소중한 것에 집중하기 위해 소중하지 않은 것들을 줄여 나가야 했다. 그렇게, 삶에서 사랑하는 것만을 남기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미니멀리즘은 다이어리의 To Do List처럼 한 번 밑줄 긋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책상을 한 번 정리했다고 해서, 필요 없는 모든 물건을 처분했다고 해서 끝나는 과제 같은 것이 아니다. 방심한 사이 늘어나버리는 허리둘레처럼, 미니멀리즘은 수많은 유혹 속에서 지속적으로 지켜내야 할 가치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 운동을 했던 사람이 필요성을 느껴 다시 운동을 시작하듯, 나도 최근 미니멀리즘을 다시 삶 속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가장 쉬운 '물건 버리기'부터 시작했다.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 사용한 적도 없고, 딱 봐도 필요 없게 생겼고, 앞으로도 쓰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녀석들부터 말이다. 눈에 띄는 곳에 있는 녀석들부터 차례로 사진을 찍어 '당근 마켓'에 올렸다. 당근 마켓은 위치 기반의 중고나라라고 생각하면 쉽다. 본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노출시켜주고, 중고나라처럼 업자가 아니라 개인 간의 거래가 활발하기 때문에 신뢰도도 중고로운 평화나라보다는 높다.
나는 필요 없는 것들은 처분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다. 나는 아주 헐 값에 판매한다. 그 대신 우리 집 앞까지 와서 직거래를 한다. 가끔 택배로 거래하자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웬만해선 하지 않는다. 포장할 박스를 구하고, 안전하게 포장을 하고, 편의점에 가서 그 사람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입력하면서 택배를 접수하는 일은 상당히 성가시다. 시간은 곧 돈이다. 몇 푼 더 받느니, 헐 값에 물건을 내놓으면 거래도 빠르게 이루어지고 인생에서 피곤한 일 일부를 없앨 수 있다.
당근 마켓에서 하루는 약 20,000원 정도 하는 샌드위치 메이커를 3,000원에 팔았다. 구매자 분께서 우리 집 앞까지 오셨다. 나는 간단하게 샌드위치 메이커를 닦고 알맞은 쇼핑백에 담아 전해드렸다. 그런데, 몇 년간 수 백번이 넘는 중고 거래를 했던 '프로-중고러'인 내가 이렇게 마음이 훈훈해진 것은 아래 사진 덕분이었다.
거래 매너에 대한 기준이 중고로운 평화나라에 있다 보니 약속을 잡아 놓고도 안 나타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며, 사기꾼들도 심심찮게 있다. 나도 거래 매너가 좋지 않았던 적이 있고. 그런 와중에 구매자 분은 금액으로 봤을 때는 얼마 안 되는 거래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담는 봉투 안에 천 원짜리 지폐 세 장과 함께 꼬마 약과 두 개를 넣어두셨다. 처음에는 웬 봉투가 이렇게 두툼한가 했는데 구매자 께서 넣어둔 것은 돈과 약과가 아니라 존중과 배려였다. 분명 한 여름인데, 안도현의 시가 불쑥 생각났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뭐 대수롭냐고 할 수 있다. 사실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교환 가치를 제공하기만 하면 된다. 샌드위치 메이커의 경우는 3,000원이라는 화폐였다. 보통은 3,000원을 받고 물건을 건네드리고 잘 쓰시라며 인사하고 거래가 끝이 난다. 특히 저렴한 가격의 거래일수록 거래 행위에 의미를 담는 사람은 잘 없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이기도 하고. 그런데 구매자 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행위는 그 '하나'가 될 수 있다. 나는 구매자는 왜 나와 거래를 할 때 돈을 봉투에 약과 두 개와 함께 담았을까? 얼굴도 모르는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3,000원짜리를 깎고 싶어서? 시간이 남아도니까? 나는 구매자가 나와 거래할 때만 이렇게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과 3,000원짜리 거래를 하기 위해 돈 봉투에 같은 모양으로 정렬된 지폐와 약과 두 개를 넣어 뒀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구매자와 만나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존중과 배려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마주쳤던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흘러가는 일상을 기억에 남는 결정적 순간으로 만들어주는 <순간의 힘>에서는 '각본 깨기'라는 것이 나온다. 쉽게 말해 뻔하게 예상되는 일상에 새로움이나 반전을 주는 것이다. 봉투에 담긴 3,000원과 약과 두 개는 중고거래에 대한 나의 각본을 부숴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구매자의 각본 깨기가 나에게 유독 감동적인 순간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러한 각본 깨기가 존중과 배려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구매자는 각본 깨기라든지, 감동적인 순간이라든지, 이번 판매자를 특별히 존중해야겠다든지 하는 의도가 없었을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소한 행위에 감동을 받는 것은 그것 자체가 '각본 깨기'에 해당하는 것일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처음 마주치는 사람을 통해 존중과 배려를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기대조차 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홍춘욱 박사 님의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강연이 떠올랐다. 선진국이 경제 규모뿐만 아니라 신뢰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하드웨어는 성장했지만 소프트웨어적으로는 아직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한 국가의 신뢰도는 연체율로 평가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돈을 빌렸으면 정해진 기간 내에 갚고, 아무리 중고로운 평화나라라고 하지만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고, 친구 간의 가족 간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너와의 약속을 지키겠다'라는 뜻의 신뢰는 존중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생기기 어렵다. 존중하지 않는 대상과의 약속을 지키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자주 인용하는 개념으로 사르트르의 앙가주망(Engagement)이 있다. 나의 존재, 나의 행동 하나, 나의 발자취가 의도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사회 참여 행위이며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라는 것이다. 중년 아주머니의 배려는 하나의 앙가주망이었고 그로 하여금 나는 아주머니께 신뢰가 생겼다. 존중, 배려, 신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데일카네기 인간관계론>의 핵심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상대방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해라'라는 것이다. 관심을 갖고, 미소를 짓고, 비난을 하지 않으면서 칭찬과 인정하는 말을 하며,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그 사람의 관심사에 대해 더 말할 수 있도록 경청하는 것은 모두 그 사람이 중요한 느낌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존중과 신뢰 역시, 상대방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한다. 중년의 아주머니인 구매자는 이미 이러한 관계의 핵심까지 알고 그렇게 하신 것일까. 꿈보다 해몽이겠지.
천 릿길도 한 걸음부터 이듯, 세상의 변화는 결국 개인의 작은 발걸음에서 출발한다. 용기와 변화는 전염된다. 아주머니의 봉투에 담긴 배려는 나에게 감동적인 일을 넘어서 충격이었다. 뱉은 말은 지키고, 함께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서 그런 배려가 충격이 아닌 감사한 일상으로 다가오길 소망한다.
방금도 아디다스 신발 1개, 어그부츠 1개, 토스트기 1개를 팔았다. 거래하기로 한 시각이 있었는데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둔 탓에 약속 시간에 늦었다. 존중과 신뢰에 대해 쓰는 동안 아이러니하게 신뢰를 깨는 행동을 했다. 부랴부랴 달려가서 사과를 드렸다. 다행히 시간이 크게 지나지 않아 거래는 순조롭게 되었고, 나 역시 그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정돈된 박스와 쇼핑백에 물건을 담아 드렸다. '잘 쓰세요'라는 말을 미소와 함께.
머릿속에는 사랑하는 것만,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를,
뒤돌아선 발 끝에는 신뢰를 남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