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아이의 모습도 예전만 같지 않고, 나 또한 책보다 중국 드라마를 보면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이에겐 독서 슬럼프가, 나에겐 휴직 후반기의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것이다.
다시 길을 찾아보려 책장을 뒤지곤 하지만, 근 한달동안 내가 빌려온 책들은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도서관으로 그대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다보니, 빌려오는 것도 게을러져 요즘엔 작은 아이 책 위주로만 빌리곤 했다. 큰 아이는 제가 빌린 세계사책 한 두권과 새 관련 에세이집을 무한반복하면서 다른 종류의 책들은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래도, 작년 이맘때쯤에 같은 일을 한 번 겪어서인지 그때만큼 걱정하진 않았다. 그동안 아이에 대한 내 믿음이 굳어졌기도 하고, 슬럼프가 지나면 독서 점프기가 올 것이기에 오히려 설레기도 했다. 이번엔 어느 방향으로 아이의 독서범위가 확장될까...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으리라는 설렘 가득한 내 예상은 역시나 틀리지 않았다.
며칠전, 불꺼진 방 안 잠자리에 누워 아이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큰 아이가 2학기 들어 더 친해진 6학년 형이 있는데, 워낙 생활이 모범적인 친구라 아이가 그 형과 노는 모습을 나 또한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더랬다. 그 형과 숙제를 같이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형이 제 학년보다 한 학년 윗단계의 문제집을 푼다는게 놀라워 나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나는 기회다 싶어 그 아이 엄마와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아들아, 서울에서는 그 형처럼 한 학년 선행이 아니라 6학년인데 중3 문제집을 푼대. 1학년 선행은 선행도 아니라는데, 엄만 3학년 윗단계 선행까지는 하라는 얘기 하고 싶진 않지만 적어도 한 학기 선행은 먼저 해두면 수업이 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드네. 한국사도 작년에 미리 책을 읽어두니 수업이 훨씬 재미있어졌지?
작년 이맘때 한국사 죽어도 싫다고 한 거 기억나니? 그런데 1년만에 선생님한테 한국사 수업 땐 날라다닌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잖아.
엄마 생각엔 00이가 책을 좋아하니 한국사가 그랬듯 다른 웬만한 과목들은 관련 책들을 읽는 걸로 준비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다만 수학은 그게 어려운 유일한 과목이랄까. 평범한 아이이기에 어쩔수없이 문제집을 많이 푸는 걸로 준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재미로 수학을 배우는 건 어려우니 공부로 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자. 그리고, 선행과 복습, 기본과 응용을 번갈아가며 하면 언젠간 따라잡을 수 있을거야.
3학년 때 수학 공백이 5학년 때 어떻게 나타났는지 네가 직접 깨달았지? 엄마가 늘 말하지만 공백이 있으면 나중에 그 시기를 메꾸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돌아가야할 수는 있어. 하지만 지금 시작하면 늦지 않아. 영어도 지금 조금씩 재미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언젠간 수학도 따라잡을 수 있을거야. 엄마 말 이해하니?"
"응. 그럼 방학 전까지 5학년 1학기 심화랑 2학기 기본을 끝내고 방학 때 2학기 심화랑 6학년 예습을 해야겠네."
"오. 좋아. 늦지 않았어. 돌아갈 수는 있지만 늦는 건 없으니 지금부터 시작하면 잘 따라잡을 수 있을거야.....블라블라"
말을 하고 나니 아이가 대답이 없다. 이미 잠들어버린 아이에게 나혼자 무슨 말을 이리 길게 한건지...
하지만 다음날 아이는 스스로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그 형과 간식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큰 아이. 내가 데크 위에서 읽던 책을 한 권씩 잡더니 간식을 먹으며 책을 읽으며 책에 대한 대화를 두런두런 나누는 두 아이들을 보니 기특했다.
작은 아이가 아파 큰 아이보고 알아서 숙제하라며 들어와 아이를 돌보고 있자니 혼자 남아 책을 읽다 들어온 큰 아이가 동생이 깨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엄마, 6학년2학기 때는 세계지리 배운대. 지리 관련된 책을 찾아봐야겠어."
"엄마가 마침 지리 관련된 책 읽고 있는데 이 책 읽어볼래?"
(여담이지만 난 늘 아이가 읽었으면 하는 책을 아이가 보는 앞에서 내가 읽곤 한다. 혹여나 아이가 관심가지면 바로 넘길 수 있도록 말이다. 의도가 듬뿍 담긴 행동이지만 아이는 아직 엄마의 의도를 눈치채진 못한 것 같다. 다행히도..)
던져진 미끼를 덥석 문 큰 아이. 예전에 몇 번 디밀었을 땐 쳐다도 안보던 큰 아이는 내가 읽던 책을 넘겨받더니 바로 빠져들었다. 한국사도 같은 방법으로 아이를 끌어들였는데, 세계지리도 이 정도면 좋은 시작이 되었겠지?? 하핫...
(내가 권한 책 제목은 "세계시민을 위한 없는 나라 지리이야기"로 현직 지리교사들이 아이들 눈높이에서 재미있게 들려준다. 초등 고학년부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물론 머릿말에서는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썼다고 했지만....)
수학만큼은 독서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문제집을 풀기로 했다. 참고로 난 대한민국 대표 수포자라 수학 공부방법 만큼은 지금까지도 도저히 모르겠다. 모 뇌섹 연예인이 했던 것처럼 차 번호판 가지고 수학 공식을 만들 수 있다는 등의 생활 수학 어쩌고 저쩌고 조언은 가능하지 않음을 안다. 나도 못하는 수학을 어찌 아이에게 잘할 것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그저 뒤쳐지지만 않아도 다행이려니 하며 대다수의 대한민국 학부모처럼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도 문제집 많이 풀라는 말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 과학, 국어나 한문, 세계사, 지리, 경제, 정치 같은 대다수의 고등 과정의 교과목은 대개 폭넓은 독서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안다. 여태까지 한결같이 지켜온 이 신념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우리나라 교육방식이 변하지 않는 한, 언젠가 이 신념이 깨질 수도 있겠다는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다. '이것만은 절대 안돼'라는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 지 알기에 학원이든, 문제집이든 다른 방법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는 게 이곳 유학생활 1년만에 얻은 깨달음 중 하나다. 그래도, 내 아이가 독서 하나로 충분히 교과과정을 미리 학습할 수 있음을 경험했기에, 그 경험을 밑거름삼아 다른 과목도 깊이 있는 책읽기를 통해 다가가기로 했다. 예를 들면 작년 한국사가 그랬듯 지리 공부도 1년치 선행으로 말이다.
꼭 상위 학년 문제집을 풀어야만 선행일까? 6학년 지리 내용을 책으로 보는 것도 나름 선행이라 한다면, 우리도 서울에서 나름 선행 대세에 잘 합류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것도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방법으로 공부 아닌 공부를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싶다. 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