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활을 2개월 남겨놓은 지금, 나름 평화로운 날이 지속되다보니 아이도 나도 너무 마음을 놓은 것일까. 2학기, 한 달여의 재적응기간과 한 달여의 유학마을 총무로서 나름 큰 행사를 끝내놓고 나니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이어졌다. 공부보다 책읽기가 좋다는 큰 아이지만 요즘은 만날 같은 책만 읽는게 지겨운지 책에 통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 그렇다고 다른 종류의 책을 적극 찾아보지도 않으면서..)
맞다. 작년 이맘때에 이어 또 다시 그 분이 찾아오신 것이다.
독서슬럼프
사실, 슬럼프라는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들 쓰는 말이니까 쓰긴 하지만, 뭐 열정적으로 매달린 적도 없는데 슬럼프라는 말이 낯 간지럽기도 하다.
아이는 2학기 즈음부터 관심사가 곤충에서 새로 넘어갔다. 산넘어 산이라고, 곤충이야 산으로 들로 나가면 되니 그맛에 유학생활을 즐겼었는데, 새는 또 어디서 찾나...
새소리만으로 새를 구분하자니 이 소리도 새고 저 소리도 새니... 동고비니 때까치 어치니 알락꼬리마도요니 그림만 내내 보고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일락말락하는 새를 가지고 구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해보였다.
그런 까닭에, 작년에 곤충 찾아 서울 이곳저곳을 헤매듯 유학을 와서도 순천이니 어디니 찾아헤맬 수밖에 없는데 그게 뭐 동네마실 나가는 것도 아니고 또다시 난감해졌다. 그나마 곤충은 작아서 시골에만 오면 발견이라도 되지. 곤충 잡고 싶다해서 유학 오니 이번엔 새 찾으러 천수만으로 가잔다. 아이고.
새를 구분할 줄도 모르고, 망원경을 볼 줄도 모르는데 올지 안올지도 모르는 달랑 다섯마리 살고 있다는 새를 찾아 이번엔 또 어딜 가란 말이냐. 아들아.
그런 까닭에 아들의 요구는 번번히 묵살되기 일쑤.
엄마가 곤충 때만큼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일까, 새에 대한 갈증을 사진작가들이 쓴 새 관련 책으로 무한반복 해소하던 큰 아이는 다른 종류의 책엔 일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오로지 새 아니면 용선생세계사.
용선생 한국사도 찬밥이 된지 오래라 이번에 잠시 서울에 올라갔을 때 아예 서울로 옮겨놔버렸다.
도서관에서 아이가 관심있을 법한 책들을 빌려서 쏟아부어봐야 결국 그대로 도서관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나 또한 책 빌리는 것에 시들해져버려 작은 아이 그림책 위주로 빌리게 되었다.
그러던 아이가 친하게 지내는 6학년 형님과 이야기를 하며 다시 책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부쩍 더 가까워진 두 아이의 공통 관심사는 당연코 동물, 책.
며칠전엔 도서관에서 만나서는 서로 붙어 앉아 각자의 책을 재미나게 읽다가, 서로 자기 책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킥킥대더니 오늘도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우리집 데크 위에 마침 내가 읽느라 펼쳐둔 책을 한 권씩 집더니 읽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서로 자기 책 재미난 부분을 읽어주며 어찌나 즐거워하던지. 몸으로 놀기보다 입으로 놀기를 더 좋아하는 두 아이 성향이 어찌저찌 맞는 것인지 한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붙어서 노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선한 영향력을 서로 주고받는 두 아이.
워낙 모범적인 6학년 형님이 잘 맞춰주기도 하거니와, 큰 아이의 지식의 깊이가 형님만큼은 아니라도 나름 서로 토론하며 노는 게 좋았던 모양이다. 서로 무슨 책을 읽는지 관심을 보이며 사이좋게 책 읽는 아이들이 기특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선한 영향력을 기꺼이 발휘해주고 있는 6학년 형에게 무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ㅇㅇ야, 엄마가 못하는 일을 형인 네가 해내는구나. 우리 ㅇㅇ이와 잘 지내주어 고마워!!"
둘은 숙제도 가끔 사랑방에 모여 같이 하기도 한다.(물론 대부분을 수다로 보내긴 해도 6학년 형님은 워낙 스스로 할 일을 하는 친구라 못한 숙제는 집으로 돌아가서 마무리하곤 한다. 우리집큰 아이는 물론 적당히 숨기고 끝났다며 덮어버리지만... 하아...)
1학기땐 그렇게 숙제를 같이해도 형이 어떤 숙제를 하는지엔 관심을 안두더니만, 이젠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 날이 2개월밖에 남지 않아서 나름 걱정이 되었던 것일까.
사랑방에서 같이 놀던 형이 집으로 돌아가고 사랑방에 홀로 남아 위인전을 읽고 돌아온 큰 아이가 내게 말했다.
" 엄마, 형이 6학년 2학기 땐 세계지리 배운대. 그리고, 형은 6학년인데도 중 1거 풀면서 알 수없는 기호들 얘기하더라. 엄청 쉽다는데 도저히 난 못 알아듣겠어. 다들 지금 학년거보다 더 앞서서 한다는데 꼭 그래야해?"
오호라. 드디어 네가 조급해지기 시작했구먼... 오예!
아이에게 마침 읽고 있던 지리책을 추천해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엄마가 아무리 미끼를 던져도 안 물면서, 형님의 미끼는 덥석 무는구나. 허허. 요녀석. 그래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나는 마침 전 날 그아이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슬쩍 겁을 주었다.
"아들아, 요즘 한 학기 선행이 어디 선행이더냐. 한국사를 봐봐. 작년에 겁먹고 한국사 책 보기 시작했잖아. 그 땐 싫다던 한국사가 지금은 어때? 수업시간에 날라다니잖아. 안그래?"
"뭐. 날라다니는 건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틀리게 말씀하시는 걸 내가 자주 지적하긴 하지."
"거봐. 수업이 잘 들리니 지적도 하는 거야. 지리도 미리 봐두면 6학년 때 날라다닐 수 있을걸? 요책 엄마가 추천할게. 하하...
그런데, 수학은 어때? 설명을 해주셔도 당췌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 선생님이 맞게 말씀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잖아? 기왕 수업하는거, 생소함만 가셔도 수업이 훨씬 재밌어지니 적당한 선행학습은 필요한데, 우린 지금 수업 복습만으로도 헉헉대고 있잖니. 예습은 커녕 복습도 잘 안되고 있고, 기본으로 끝나니 응용은 해보지도 못하잖아? 그럼 중학교 때 그 공백을 메꿀 수밖에 없는데 너 3학년 수학 공백 5학년 때 메꾸기 어려워서 얼마나 고생했니. 그 시기를 제대로 못 넘기면 나중에 훨씬 더 고생하게 되는거야."
잔뜩 겁 먹은 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영업상 기밀이지안 특별히 알려주는 것마냥 으스대며 말했다.
"음. 일단 서둘러 메워야지. 지금도 늦지 않았어. 깨닫기라도 했으니 지금이라도 열심히 공백을 메우면 될 거야. 한국사니 세계지리는 책을 부지런히 읽으면 우리 아들 정도 집중력에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거고, 수학에 당분간 집중할 필요는 있겠다. 블라블라...."
그렇게 바짝 군기가 든 아이는 오늘 내가 뭐라 잔소리 한 마디 안했는데도 영어며 수학이며 스스로 숙제를 했다. 내가 추천해준 지리책도 재미나게 읽던 큰 아이.
작은 아이가 아파서 재우다보니 조그만 방 한 칸, 어두침침한 곳에서 숙제를 하느라 졸리다며 멋쩍은 표정으로 내일 일찍 깨워달라는 말로 잠에 들었다.
이번 조언의 효과가 과연 며칠이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3일만 지속되어도 훌륭하지 싶다...) 그래도 아이가 스스로 공부의 필요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기특하고, 3학년 때의 암흑기를 잊지 않고 그 시기가 다시 오지 않도록 나름 학습 의지를 다지는 모습이 든든해보였다.
내일 분노하며 이 글을 지우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분노하기 전에 후다닥 글을 올려 큰 아이의 결심을 응원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