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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Earth Dec 25. 2022

엄마표 영어교육, 꼭 단계가 있어야 할까?

 큰 아이는 초목달에서 원서읽기 수업으로 넘어갔다. 초반엔 신나게 하다 나중에 재미없는 이야기가 이어지며 몸을 배배꼬며 억지로 듣던 초목달과 달리, 원서읽기 수업은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인지 신나게 듣는 것 같았다. 물론, 다 듣고도 안 들은 것처럼 오류가 자꾸 나오다보면 짜증을 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주도중인 문법 문제집과 온라인으로 듣는 원서읽기 수업을 지겨워하지 않고 매일 꾸준히 하는걸 보면 예전만큼 영어에 거부감을 가지고 억지로 하는 것 같지 않아 다행이다. 게다가 간혹 넓은 사막에서 공룡 화석 발견할 확률 만큼이나 희귀한 확률이긴 하지만, 모르는 단어를 사전으로 찾는 기적을 행하기도 하니, 눈앞에서 펼쳐지는 모세의 기적 저리가라 할 만하다 하겠다.


작은 아이 또한 내가 읽어주는 영어책을 재미있어라하니, 큰 아이를 목표로 하되 작은 아이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원서 동화책을 자주 읽어주곤 한다.


영어교육을 마음 먹은 초기엔 내가 아는 영어 원서에 대한 지식이 아예 없다보니 참고해보겠다며 유튜브에서  전문가 엄마들의 영어교육 영상을 찾아 들었다가 이게 외국어인지 우리나라말인지 알 수 없어 당황했다.  OXFORD READING TREE나 잠수네 영어 어찌고... 하면서 집중듣기니 흘려듣기니 000시리즈를 읽히라느니, 000시리즈는 어렵다느니, 챕터북은 언제 들어가야 하는 거고 블라블라...하는 말을 듣자면 당췌 000책은 뭐고, 000책이 뭔지도 몰라 두눈만 말똥거렸다. 게다가 챕터북은 또 무슨 책인고... 아이들이 외국어 수업을 처음 들을 때 느낌도 저럴까 싶을 정도로 전문가 엄마들이 엄마표 영어라며 외치는 각종 전문용어들의 향연을 듣다가 문득, 교육방법 알아내겠다며 낭비하는 시간에 차라리 내 맘에 드는 원서 한 권이라도 내가 먼저 읽어 재밌으면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중고마켓에서 '예민맘 사양합니다.' 라고 하면 도대체 예민이 맘이 누구냐며, 예민이라는 아이가 그리 유명한 아이냐고 묻는 사람 있지 않은가.. 그게 바로 나다. 그러니 온갖 전문용어들이 난무하는 영어교육 썰은 어떻겠는가. 눈알이 뱅글뱅글 돌고, 그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나만 그런가?)

게다가, 전문가를 자칭하는 엄마 중에 자신의 집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 펼쳐보이며 소개를 하기도 했는데, 온갖 화려한 전집들로 꽉 채운 책장들을 보자니 어른인 나조차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읽은 책들은 스티커를 붙여서 뒤집어 넣고, 안 읽은 책을 읽게끔 한다는 전설같은 이야기와 무려 영어 원서 500권을 읽었다는 이야기들 모두 나를 숨막히게 했다. (읽은 책 권수는 도대체 어떻게 세는걸까? 한글책조차 그저 책이든 바닥에서든 책을 주워서 맘에 내킬 때 읽는 우리집으로서는 한글책도 아니고 영어원서 권수를 어찌 셀 수 있는지 그저 궁금하기만 하다.)

게다가, 어떤 유튜버 엄마는 책을 꼭 레벨과 번호 순서대로 책장에 꽂아두고 순서대로 읽힌다고 했다. 나만 그런것일까. 옥스퍼드 리딩트리 단계별 책들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거의 학습서마냥 내용이 재미있지 않게 느껴진 건 말이다.(물론, 그 분의 아이들 재미있게 잘 따라와주었고 뭔가 큰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소개하는 것일 테지만...)


우리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배우고 한국어로 그림책을 볼 때 단계를 생각하며 보진 않는다. 글밥 적당한지 여부를 적당히 고려할 뿐. '우리 아이는 6살이니 2단계 그림책이 적당하다.'거나, '우리 아이는 5학년이니 9단계 동화책이 적당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처럼, 영어책도 굳이 단계별로 구분해서 읽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늬만 영문과지만, 그래도 영문과를 나와 언어로(중국어지만) 한때 밥 벌어먹고 살아봤던 어쭙잖은 얄팍한 경험에 비추어보자면, 평생 단계별로 수업을 들어왔던 영어보다, 아예 생초보 시절부터  304구문 기초책 한 권 떼고, 한자실력만으로 중국어 드라마와 원서책을 섭렵하며 키워낸 중국어 실력이 훨씬 월등해보인다. 물론 공부스트레스와 부담감은 영어의 백분지일도 안되었으니 말 다한 거 아닌가.


그런 연유로 유튜브니 블로그 등에서 아이들 영어교육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며 하는 영상은 일단 거르고 본다. 나부터도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이 많은데 그걸 어느 세월에 내 철학으로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그 영상들을 다 보고 실천하려다 내가 먼저 지칠 것 같으면 아예 시도조차 안하는게 엄마나 아이의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숨막힐 것 같은 책들이라니. 좋다며 우리 아이들에게 강요했다간 원서 책을 읽으며 즐거움을 찾기는 커녕 그저 의무감으로 읽으며 책을 싫어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았다.


굳이 교육 방법을 고르느라 쓸 힘을 아끼고 도서관으로 향하니, 아이들에게 읽어줄만한 영어 원서 그림책은 널리고 널려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론 영어 교육에 대해 힘 쭉 빼고 도서관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이 책 저 책 읽어보고 레벨에 상관없이 그냥 한글책처럼 맘에 드는 그림책을 골라 읽어주곤 했다. 'The Great Monster Hunt'는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성공한 책이었다. 그냥 그림이 예뻐서 빌려왔는데 끝 부분 어마어마한 반전에 가만히 듣고 있던 작은 아이도, 저 멀리서 숙제하다 슬금슬금 다가온 큰 아이도 박장대소했다. 그 후로 나는 몇 주동안 그 이야기책을 무한반복해야 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도.


최근엔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 다큐, 페파피그 등의 애니메이션도 '한글 자막 없이' ONLY ENGLISH로만 보여주고 있는데, 이미 수십 번도 더 본 다큐멘터리라 그런지 큰 아이는 자막 끄고 영어로만 보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듯했다. 간혹 귀에 훅훅 들어오는 단어는 뭐냐고 물어봐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중국어는 애초부터 책, 드라마로 배우다보니 원서읽기나 자막없이 드라마 보는 것에 익숙하지만, 영어는 나도 잘 못하다보니 말문이 막혀 어버버 때가 더 많다. 나도 같이 영어 공부하는 느낌이랄까.)


여담이지만, 동영상은 영어로만 보는 게 당연한 줄 아는 작은 아이도 자신이 좋아하는 페파피그를 무한반복하며 뭘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게 깔깔거리곤 한다.(뭘 알고 깔깔대는지는 잘 모르겠다. 뭐 어떤가. 자막 없는 순수 영어지만 본인이 재미 있다하면 되는거지.)


역시나 오늘도 넷플릭스의 애니멀만 자막 없이 원어로 무한반복하고 있는 큰 아이에게 말했다.

"아들아 재밌니?"

"응.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라 들을 만한데?"

"뭐, 그럼 다행이네. 어차피 다큐 보자고 영어 배우는 거지, 영어 배우려고 다큐 보는 건 아니잖아?"

"아... 그러네."


뭔가 심오한 진리를 깨달은 것 같은 큰 아들의 표정이 편안해보인다.

전부 다 알아듣지 못하면 뭐 어떤가. 아직은 새 종류나 서식지, 부화 같은 저 좋아하는 영어단어 몇 개 익혔을 뿐이긴 하지만, 나 또한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무한 반복으로 중국어 귀를 뚫었으니 큰 아이도 재미있는 다큐멘터리 무한반복 하다보면 언젠가는 귀가 뚫리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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