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래서 눈물이 나는 줄 알았다
너무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나는 줄로만 알았다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아픈 줄로만 알았다
이건 나의 보물 같은 이야기이다. 아무도 모르게 가슴 깊숙이, 아주 깊숙이 숨겨놓은 나만의 소중한 이야기이다. 잊은 척 살다가 매미소리가 귀를 어지럽히는 어느 여름날이 되면 어찌 막을 도리도 없이 그때의 그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 여전히 그날에 머무르게 되는 별 같은 이야기이다. 어릴 적 나는 바쁘신 부모님 때문에 여름방학이 되면 항상 할아버지 댁에서 여름을 났다. 할아버지 댁에 가는 건 좋고도 싫었다.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이 좋았고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마당이 좋았다. 개울에서 만나는 작은 청개구리도 좋았고, 시원한 툇마루가 좋았다. 어릴 적 멀미가 심한 나였기에 멀고도 먼 산골짜기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 가는 길과 처음 도착한 3일 정도의 시간 동안 엄마가 보고 싶은 것이 싫은 것이었고 숫자로 따지면 좋은 것들이 훨씬 많았으니 어린 나는 여름방학을 꽤나 좋아했던 것 같다. 아홉 살 무렵부터 여름 방학은 항상 할아버지와 함께 보냈으니 열여덟의 여름까지 십 년 정도를 그 산골짜기의 청색 기와집에서 더운 여름을 났다.
열일곱의 여름이었다. 그 해는 유독 많이 덥지 않았던 것 같다. 한참 사춘기였던 터라 이번 방학은 친구들과 보내겠다고 얌전히 지내겠다고 부모님을 잠시 졸랐지만 부모님은 이젠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위해서 너를 보내는 것이라 하였고, 열일곱의 나는 그 말을 전부 헤아릴 순 없었지만 할아버지의 등이 더 이상 나를 업을 수 없을 정도로 굽은 건 알았다. 그래서 그 해의 여름도 나는 청색 기와집에서 선풍기와 만화책, 수박과 참외로 여름을 나기로 했는데, 한 가지가 더 보태어졌다. 방학이 시작된 지 사흘이 흘렀고 이젠 눈을 감아도 다닐 수 있는 할아버지 집의 툇마루 한가운데 벌러덩 누워있었다.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가장 친한 김 씨 할아버지 댁에 감자전을 나눠주러 가셨고, 나는 감자전을 해치운 접시를 옆으로 슬쩍 미뤄놓고는 시원한 툇마루를 즐기며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 중이었다. 맑은 하늘에 해가 아주 쨍쨍했고 매미소리가 만연했다. 그런데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졌다. 소나기 인가했지만 여전히 하늘은 맑았고 가는 여우비만 누워있는 내 발가락을 간질였다.
하지만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것이 비를 내리는 하늘의 마음인지라 슬슬 무료하던 차에 할아버지를 마중 나가겠다며 우산 하나를 들고는 슬그머니 집 밖을 나섰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몇 번 가보았던 김 씨 할아버지네의 집을 머릿속으로 뇌내이며 할아버지의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걸어갔다. 잠시 후 익숙한 작은 다리가 나왔다. 그 당시 시골의 다리들이 다 그렇듯 난간 하나 없이 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천을 하나 건너는 아주 작고 짧은 다리였다.
"조심해, 그러다가 빠져"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송사리들이나 개구리들을 구경하는 최적의 장소였기에 종종 그 다리에 앉아 구경을 했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는데 왠 젊은 남자가 서있었다. 마을에서는 여태 그렇게 젊은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너무 놀라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자 하얀 얼굴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 다시 말했다.
" 강에 빠지고 싶은 사람처럼 그렇게 물을 오래 쳐다보면 물이 알아. 자기를 좋아하는걸, 그럼 널 데려가고 싶어 할걸"
갑자기 기분 나쁜 얘기를 늘여놓는 목소리에 순간 울컥한 나는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 이 정도 깊이의 물에 빠져서는 죽기도 힘들지 않아요? "
" 깊이가 얕다고 물이 아닌 건 아니야. 조심해 "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진 나는 그즈음의 사춘기 아이들이 그렇듯 애매하게 대답을 얼버부리며 다시 할아버지를 찾으러 가려고 발걸음을 떼려고 하자 그가 다시 말했다. "너희 할아버지 김 씨 할아버지네 없어. 그냥 집에 가서 기다려. 오늘 늦으시니까" 그가 처음 나를 불렀을 때보다 더 놀란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우산만 꼭 붙잡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숨도 잠시 참았던 것 같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치고 몸만 큰 어린아이였던 열일곱의 나는 우산도 내팽개치고 집으로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집에 다와 갈 때쯤에 할아버지의 슬리퍼 한 짝이 벗겨졌다.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온 길을 바라보았다. 얕게 흩뿌려대던 빗방울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흔적도 없이 말라 버린 후였다. 여전히 하늘은 파랬고 논과 밭도 파랬다. 귓가엔 매미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제야 뭔가 창피했다. 열일곱의 사춘기란 무서움마저 치기 어림으로 무마하는 나이였다. 괜히 혼자 얼굴이 빨개져서는 벗겨진 신발을 똑바로 신고 혼자 투덜거리며 대문을 열었다.
“뭐하는 사람이야, 괜히 사람 기분 나쁘게 이상한 말이나 하고”
짧은 외출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티브이를 여기저기 돌려보다가 이내 흥미를 읽고 툇마루에 베개를 베고 누워 왕창 빌려온 만화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어둑해진 하늘이 보였고 해가 긴 여름인데도 어두운 청녹 빛의 하늘에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을 알았다.
" 할아버지- 아직 안 왔어? "
소리치며 방문 하나하나를 열어보고 작은 별채까지 들여다봤지만 아무 기척이 없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하품을 하고는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물을 틀어 호스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는데 그제야 대문이 열렸다. 할아버지가 낮에 내가 다리에 놓고 온 우산을 들고 집에 들어왔다. 그제야 낮에 보았던 남자가 다시 기억이 났고 평소보다 늦게 집에 돌아온 할아버지가 미웠다.
"할아버지 왜 이렇게 늦었어. 잠깐 다녀온다며!"
" 할아비 기다렸구나. 우리 손녀 배고팠어? "
할아버지는 언제나 같은 포근한 웃음을 지으며 김 씨가 갑자기 시내에 나가자고 했다며 한 손엔 우산과 다른 한 손에 들려있던 도너츠가 든 종이봉투를 툇마루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 하얀 봉투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고 있었고 투덜거리던 입을 금세 집어넣고는 도너츠를 하나 꺼내먹었다. 할아버지는 저녁 금방 차려줄 테니 저녁을 먹고 도너츠를 먹으라고 했지만 나는 도너츠도 먹고 저녁도 먹겠다며 손을 멈추지 않았다. 시골의 밤은 일찍 찾아오기에 서울에서는 한참 이른 시간이지만 이불을 깔고 누워 천장만 가만히 바라보다 도너츠 때문에 잊었던 낮에 본 남자를 떠올리고는 망설이다 할아버지가 잠을 청하는 방으로 건너갔다.
베개 하나를 들고 조심히 할아버지방의 문을 열자 할아버지도 아직 안 주무셨는지 간만에 시골에서 자려니까 무섭냐고 농담을 하시며 이불 한 채를 꺼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 할아버지와 나란히 누웠지만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괜한 상념과 낮잠으로 인해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자 할아버지는 잠이 오질 않냐며 꿀물이라도 타 주랴하며 물었고 나는 다른 대답을 했다. 할아버지 우산 어디서 가지고 왔어?
" 우산? 그거 대문 밖에 있던데 네가 내놓은 것 아니었어? "
"어, 어어 맞아. 내가 잠깐 쓰고 나갔다가 깜빡했네.. 있잖아, 할아버지. 동네에 젊은 남자 이사 왔어?"
" 젊은 남자? 혹시 얼굴 하얗고 키 큰 청년 말이냐? 너는 처음 보겠구나. 올 초 겨울에 저- 위에 오래된 목련나무 알지? 그 옆집에 이사 왔어. 젊은 사람 다 떠나는 마을에 웬일인고 물어보았는데 그저 웃고는 별 말이 없더라고. 무슨 사연인진 모르겠지만 사람은 아주 착해. 성실하고."
나에게 무서움을 선사한 남자를 칭찬하는 할아버지의 말에 뭔가 억울해져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금세 잠이 들었고 꿈을 잘 꾸지 않는 나는 그날 깊은 물속을 구경하는 꿈을 꾸었다. 물속은 어두웠으나 무섭진 않았다. 꿈인데도 따듯함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인어라도 된 듯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누볐다. 한참을 유영을 즐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다급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