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보이는 건 파아란 하늘이었다. 마치 마당의 평상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풍경처럼, 발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우물 앞에 디딤돌을 밟고 서있었다. 너무 놀라 중심을 잃으려는 순간 할아버지가 달려와 나를 낚아챘다. 할아버지와 함께 바닥으로 넘어졌고 잠시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니 이번엔 익숙한 방의 천장이 보였다. 머리 위가 축축했고 내 옆에는 할아버지와 언젠가 보았던 마을의 의사를 자처하시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눈을 뜬 나를 발견하시고는 할아버지는 조용히 볼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많이 놀랐지 괜찮다. 더 자거라 그 말과 함께 다시 한번 잠에 빠졌고 다시 눈을 떴을 땐 김 씨 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방문을 열어놓고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 손녀가 원래 몽유병이 있었나 며느리한테 한번 물어봐야 쓰겠구먼. "
" 아니 저놈 콩알만 할 때부터 내가 여름 내내 옆구리에 끼고 살았는데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니까, 아들한테 전화하긴 했어. 일단 깨고 나면 다시 전화해봐야지."
두분의 대화를 듣고 내가 자면서 걸어나간걸 알았다. 살면서 몽유병을 한 번도 겪지 못했기에 많이 놀라긴 했지만 정말 아무런 기억이 없어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불렀다.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방으로 들어오시며 일어났냐고 하시며 물을 한잔 쥐어 주었다. 나는 물을 마시고는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 앉았다. 할아버지는 거듭 괜찮냐고 묻지만 나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멀쩡했다. 너무 많이 자서 약간의 두통이 있는 것 말고는 오히려 상쾌한 지경이었다. 고개를 끄덕였고 무슨 일이냐 물으니 아침에 일어났는데 내가 없어 마당으로 나갔더니 마당 한편에 오래된 우물 앞에 내가 서있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나 쓰셨던 우물이라 사용을 안 한지는 30년이 넘었고 그래서 우물에는 두껍고 무거운 판자가 항상 올려져 있었다. 그것 마저 잠든 상태의 내가 밀어냈다니 순간 스스로가 낯설고 무서운 기분이 들기는 했다. 아침부터 애를 먹인 손녀를 위해 할아버지는 늦은 점심상을 차렸다. 아침과 점심까지 거르고 잠을 잔 성장기 청소년은 할아버지의 걱정이 무색하게 밥그릇을 뚝딱 비웠다. 배가 차고 나니 더 괜찮아졌다. 넘어지면서 팔꿈치가 살짝 까진 것 말고는 다친 곳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마음이든 몸이든 괜찮지 않으면 부모님을 불러 주겠으니 서울로 올라가라 했고 나는 거절했다. 그 후로도 할아버지는 몇 번을 물었으나 나는 그럴수록 더 가기가 싫어졌다. 부모님에게 전화를 해서 안심시키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실랑이는 없었다.
작은 마을이라 벌써 소문이 퍼져나가 오후 내내 할아버지의 집엔 손님들이 문병 아닌 문병을 다녀갔다. 나보다도 넘어지면서 허리를 삐끗한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저 아랫집 이 씨 할머니, 소키우는 박 씨 할아버지, 복숭아 농장을 하는 최 씨 아저씨. 오후 내 본의 아니게 귀찮아 진건 나였다. 일일이 인사하고 차나 커피를 어설프게 타서 드리기도 하고 손님들이 가져온 선물들을 할아버지를 대신해 정리하기도 했다.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직접 딴 꿀을 주고 간 최 씨 아저씨네 꿀로 꿀물 한잔을 시원하게 타 먹으며 평상에서 노을이 져가는 걸 보고 있었다. 그때 대문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그 남자였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는 다가가 대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어제의 그 남자가 더위도 타지 않는지 긴팔 셔츠를 입고는 손에 웬 나뭇가지와 종이봉투를 들고 서있었다. 나는 고개만 대충 숙여 인사하고 할아버지에게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 아이고 젊은 청년이 마음씨도 고와. 어떻게 이런 걸 가져올 생각을 해. "
" 아닙니다 어르신. 이건 달여 드시고 이건 저 친구 잘 때 머리맡에 놔주세요. 이만 쉬세요. "
남자는 가져온 종이봉투를 가리키며 달여서 할아버지 보고 먹으라고 했고 나뭇가지는 나를 가리키며 내 머리맡에 두라고 했다. 나는 평상에 앉아서 툇마루에 앉아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힐끔 쳐다보다가 나를 가리키는 손짓에 다시 고개를 돌려 마당의 잡초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정말 할 말만을 하고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꾸벅하고 나에게도 눈길을 한번 주고는 대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왠지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따라 문밖을 나섰고 남자는 올라가는 길의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서두르는 발걸음으로 슬리퍼를 끌며 쫓아가자 그는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왜 쫓아오냐는 눈빛으로.
"저거 뭔데요. 나뭇가지"
"무슨 나무냐고 묻는 거니"
"무슨 나무고 왜 내 머리맡에 둬야 해요?"
"목련나무고, 그래야 네가 잠을 잘 자"
할 말을 다 마쳤다는 얼굴로 그가 다시 돌아서려 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왜 잘 자는데요? 그는 돌아서려던 몸을 다시 돌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물 오래 보고 있지 말랬잖아"
나는 그냥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잘못한 건 아니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와 약속을 내가 어긴 기분이었다. 별 소득 없이 집으로 다시 돌아와 그가 주고 간 나뭇가지를 보았다. 온통 초록잎에 초록열매가 달려있었다. 목련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여름의 목련은 이런 모습이구나 생각하며 나뭇가지를 손으로 찬찬히 쓸었다. 허리가 아픈 할아버지를 위해 내가 어설픈 손길로 저녁상을 차렸다. 이 씨 할머니가 주고 간 반찬들을 덜어 밥만 떠서 차렸기 때문에 차렸다고 하기 민망했지만 할아버지는 손녀가 다 컸다며 좋아하셨고 나는 부끄러움에 밥만 떠먹었다. 그날은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아주 잘 잤다. 태어나서 가장 달게 잔 잠 같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어젯밤 모습 그대로 내 머리맡에 초록색의 목련 나뭇가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