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목련꽃이 09

by Plum




나는 돌볼 다람쥐가 없어도 그의 집을 매일 들락거렸다. 그의 사람의 형체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참외를 가져가고 하루는 할아버지가 썰어놓은 수박을 가져갔다. 그리고 하루는 내가 그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도너츠를 가지고 가기도 했다. 도너츠를 가져간날은 신이 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라고 그에게 당부하듯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그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며 웃어주었다. 그를 따라 깊은 산속에 앉아 있으면 꽃사슴이 다가와 기댈 수 있게 등을 내주었고 이름 모를 새들도 다가와 그의 곁에 앉아 쉬었다. 숲을 간질이는 바람소리가 좋았고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좋았다. 그 모든 것들이 그가 있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도너츠를 매일매일 양보하고 싶어 졌다.



" 네? 오백 년이 아니었어요? "


" 응 사람의 형체를 갖춘 지가 오백 년, 영(靈)은 그 두배가 되었지. "


그는 마을을 지킨 지 천년이 된 신령이었다. 그의 일기만 보고 오백 년 즈음이라 예상한 게 민망할 지경이었다. 놀란 나를 보며 그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커다란 목련나무를 가리키며 내가 저것보다 반의반 크기도 안되었을 때 말이야.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저 나무에 영이 깃든 지 고작 삼 백 년쯤 되었을 때 하늘에서 아주 큰 비를 내려 물난리가 한번 난적이 있었어. 작은 나무들은 뿌리가 깊지 못해 떠내려갔고, 산의 작은 일부를 잃었을 정도로 큰비였는데 하늘이나 칠성들의 뜻도 아니고 그것은 그저 자연의 일이었기에 나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몇 날 며칠 쏟아지는 비만 맞고 있었지. 그때 사람들의 소리를 들었어. 저 산의 초입에서 나에게 오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고 그저 기도만 하는데 그 기도가 무엇이었는지 아니? 비를 멈춰달라는 말도 아니고 원망도 아니었다. 나를 위해 하는 기도였어. 우리 신령님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해 주세요. 이 길고 긴 우기 동안 우리 신령님 크게 상하는 곳 없게 해 주세요. 하고 하늘에 빌더라고. 말을 마친 그가 손을 뻗자 어느새 그의 곁에 와있던 다람쥐가 올라왔다. 그는 다람쥐의 머리를 간질이며 나를 보고 웃었다. 나는 내 맘속에 자라났던 미움을 들킨 것 같아 심장 한편이 따끔했다. 그를 더 마음 가득 담을수록 그를 힘들게 한 얼굴도 모르는 옛날 옛적 사람들이 미워졌다. 그는 다람쥐를 나의 손에 올려주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네 마음을 더 상하게 하는 일이란다 그 고운 마음이 상하면 내가 더 마음이 아프지 않겠니


산에서 내려와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집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내일도 그에게 다람쥐를 불러달라고 해야지 다짐하며 대문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집안 이곳저곳을 다니며 할아버지를 불렀다. 대답이 없자 나는 대문 밖으로 나가 김 씨 할아버지네를 향해 걸어갔다. 종일 맑았던 하늘이 약간 어두워졌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칠성들의 용서가 아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걸음을 재촉했고 곧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를 처음 만났던 다리가 보였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 다리를 건너던 중 무심결에 다리 밑을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순식간에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올해 유독 잦은 소나기 덕에 냇물이 불어 난 상태였지만 그렇게 깊진 않았었다. 많이 깊어도 내 키만 할 것이라 생각했던 산에서 흘러온 냇물이 발도 닿지 않을 만큼 깊었다. 마치 물에 빠진 꿈을 꾸었을 때 같았다. 깊고 어두웠다. 발이 닿기는커녕 아주 깊고 넓은 심해 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깨달았다. 신들의 화를 푸는 것에 급급해 깊은 한(恨)을 가진 한 여자의 혼을 간과했다는 것을.



'깊이가 얕다고 물이 아닌 건 아니야 '



그를 처음 만난 날 그에게 들었던 말도 생각났다. 아, 정말 그는 모르는 게 없구나. 짧아져 가는 숨과 아득해져 가는 정신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괴로웠지만 무섭진 않았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의 천년의 시간에 비하면 나는 고작 몇십 년이면 다시 우주로 돌아갈 목숨인데, 내 명을 다함으로 그가 더 이상 괴롭지 않다면 그 여자가 한을 풀 수 있다면, 이렇게 눈을 감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점점 눈이 감겼다. 순간 저 멀리 빛이 보였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자 사람의 형체가 보였고 다시 깜빡이자 그가 보였다. 그가 나를 찾은 것이다. 뭐든지 아는 그의 눈이 나를 찾아낸 것이다. 나는 그를 고요히 바라보았고 그는 왠지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머릿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러려고 모든 일이 끝났음에도 나의 육신이 살아있었구나. 이러려고, 그랬구나.'



그러더니 손을 뻗어 나의 얼굴을 감쌌고 곧 그의 입술이 다가와서 아주 잠시 나의 입술에 머무르고 갔다. 내 생에 첫 입맞춤은 너무 서럽고도 달았다. 아주 잠시였지만 마치 온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프게도 현실이었다. 나에게서 떨어진 그가 희미해져 갔다. 그의 손을 잡았다. 눈앞에 있으나 잡히지 않았다. 내 눈물에 내가 질식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미소 지었다. 다람쥐를 보는 눈 보다 따듯한 눈으로 새에게 하는 말보다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청색 기와집 아이야. 건강히 안녕히 지금처럼 세월을 건너가렴. 그럼 언젠가... '


더 이상은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희미해지던 그는 곧 별처럼 반짝였고 나는 그가 남기고 간 은하수에 빠져 울었다.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니 보이는 건 할아버지의 집 천장이었다. 가슴을 부여잡고 울었다. 심장이 너무나도 시큰거려 어찌할 줄을 몰라 가슴만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울음소리를 듣고 할아버지는 놀라 뛰어오셨고 이내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울고 또 울었다. 날이 좋았고 햇볕이 눈부시게 따가웠다. 귀가엔 매미소리가 만연했다. 한여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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