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순수함, 정말 사라졌을까?

by YUN



내 여러 소망 중 하나는

오래도록 순수함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듯,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순리처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여겼다.


경험이 쌓일수록 그리고 다양한 사람을 만날수록,

그것들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해맑은 솔직함만으로는 세상이 만만치 않았고

거침없었던 마음은 수많은 망설임 속에 파묻혔으며

일렁이던 호기심엔 현실이란 무게가 내려앉아

초를 쳤다.


그 과정을 거쳐 수많은 이들이

단단한 내면과 굳은 태도를

천진한 순수함과 맞바꾼 듯 보였다.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 역시

예전 같지는 않다는 것이 종종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도 사람이 한없이 청명하기만 하다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한 거 아니겠나.


꿈많던 아이들은 하고 싶은 일보단

해야 하는 일에 몰두하는 어른이 되었고

사랑에 눈이 멀었던 이들이

이제는 사랑 앞에서 저마다의 계산기를 두드린다.


시간은

인생의 낭만과 그 속에 섞인 찬란한 낭비를

순서대로 지워가는 듯했다.


자의든 타의든, 그것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때론 현명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 나를 보며

결국 순수란 언젠가 변질될 것이라 여겼다.


결국 세월에 휩쓸려 필연적으로 사라지고야 말 특성,

슬프지만 그 유한함은

그것을 더욱 소중한 가치로 만들어줬다.




난 어릴 적 탁하지 않은 시선을 가진 어른을

곧잘 따랐다.


흐린 동태눈이 아닌 따스한 눈길로

엉뚱한 질문들에 정성껏 대답해 주던 누군가.


성인이 되고서도 여전히 세상에 물음표가 많았던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준 소수의 이들.


나는 지금도 그들을 무척 좋아한다.

덕분에 난 세상에 대한,

그리고 나에 대한 질문을 이어갈 수 있었다.


호기심 어린 생각들이 주름지지 않도록

그들은 저마다의 지지 않는 맑음으로 나를 지켜주었다.


각자의 투명한 순수함이

언뜻언뜻 내비쳐지는 순간이 좋았다.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다가도
맛있는 음식 앞에선 한껏 들뜨던 사람
인정받는 수재로 불리지만 게임의 연이은 패배에 분해하며 열을 올리던 사람
평소엔 냉철한 분석가이지만 사랑 이야기엔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던 사람


무심코 튀어나와 어느샌가 시선에 머물러버린,

가식 없는 순박한 내면들과

사회적인 껍질 아래 드러난

무방비한 반전의 순간이 반가웠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 같은 반짝임을 지닐 수 있는 건

단지 그들이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대부분은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갔고

순수함은 그와 함께 바래져 가는 것이니까.


하지만 누군가 말했다.


순수함은 모두가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단지 그 티 없는 모습을 꺼내서 보여줄 수 있는 상대가 내가 아니었을 뿐이라고.


여러 상황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유독 내성적이고 무뚝뚝하다고 느꼈던 이가

한 친구 앞에서만 까불대며 장난치던 모습,

지적이고 근엄하던 교수님이 다른 교수님들 사이에서 농담하며 편하게 웃던 모습 등.


오래전 어른이 되었지만 그들 안엔

여전히 나이 들지 않은 천진함이 있었다.


결국 이를 아우르는 솔직함 그리고 순수함이란,

고정된 성격이나 태도가 아닌
누구 앞에서, 어떤 순간에 드러날 수 있는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즉, 그것은 내 안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보여주기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상황에도, 사람에도.


그리고 순수함이란 이면엔

비단 맑은 면모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십여 년 전, 친할아버지와 아빠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어릴 적이라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두 사람 사이에 거친 언성이 오갔고 아빠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며 씩씩대며 나를 데리고 나갔다.


며칠 동안 아빠는 말이 없었다.

단단히 화가 나있었고 무서웠던 나는 한마디도 걸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까.


새벽에 잠시 물을 마시러 나왔던 중 방문 너머로 언뜻언뜻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분명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였다.


나는 소리를 따라 살금살금 걸어갔고

방문 틈새를 빌려 소리의 근원을 엿보았다.

그리고 마주하고야 말았다.

방구석 한편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아빠의 뒷모습을.


그는 전화를 붙든 채 벌게진 눈에서 차오른 눈물을

애써 삼켜내고 있었다.

연신 "아부지...죄송해요..."를 말하며

아이처럼 울먹이던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새어 나오는 통화 속 할아버지는

그런 아빠를 어루만지듯, 조용히 달래고 타일렀다.


강인하다 못한 벽까지 느껴졌던 아빠도

부모에게는 영락없는 자식이었다.



당시엔 당황스럽기만 했던 그 상황이

지금은 사뭇 다르게 보인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저 단단해지는 일이 아니라,
어떤 감정을 더 깊이 숨기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순수함이라는 특성과 감정 역시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닌,

상황과 환경에 따라 감춰지는 것이란 걸.


내게 멀게만 느껴졌던 그들은 마냥 재미없고 딱딱한 사람들이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내 앞에선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바꿔 말하면 주변인들의 솔직하고 귀여운 면모를

내가 스치듯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나는 그들에게

'그래도 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순수함이 있다.

그 순수함은 시간에 닳아 겨우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온전한 상태로 내 안에 머물러 있다.

그것을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상대가 많지 않을 뿐.


서로의 유치함으로, 그리고 솔직함으로

물들 수 있는 시간이 이토록 귀한 이유다.

그리고 그런 나를 허락해 주는 사람은 더없이 소중하다.


그러니 당신의 빛나는 순수함과 순박한 내면을

잃지 않길, 아니 잊지 않길 바란다.


누군가의 눈빛 앞에서 편안해진 당신이

살며시 고개 들 수 있기를.


그것을 기꺼이 꺼내 보여줄 수 있는

누군가와 오래도록, 다정히 함께하길.





작가의 이전글네 콤플렉스가 내가 널 사랑하는 이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