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을 수 있는 용기에 대해
나지막이 내뱉은 친한 친구의 말에 뇌가 정지했다.
잘못 들었겠거니,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뭐라는 거야, 누가 약혼했다고? 그때 그 사람?"
친구는 잠시 시선을 피하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응, 나랑 헤어지고 나서
새로 만난 사람이랑 올해 말에 결혼한대."
"근데 지금 뒤에서
그 사람을 계속 만나고 있단 소리야? 약혼녀 몰래?"
"...... 응. 나도 내가 나쁜 년인 거 알아.
근데 도저히 못 잊겠어. 나도 너무 힘들다."
벙이 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4년간의 대학시절
매일 같이 붙어 다니며 졸업 이후에도
꾸준히 연락을 이어간 몇 안 되는 동기였다.
때론 친구처럼, 때론 가족처럼 서로가 서로를
깊게 의지하고 또 챙겨주며 우정을 쌓아왔었다.
믿기지 않았다.
수년간 내가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친구가
가장 추악하고 비겁한 부류의 사람이라니.
실망감을 넘어선 배신감이 몰려왔다.
"어... 그러니까 이게..."
멘탈이 반쯤 나간 나는
선뜻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함께 떠난 여행에서 만나자마자
묻지도 않은 말을 이실직고한 친구가 원망스러웠다.
대체 왜 이런 불쾌한 이야기를,
왜 하필 가장 신나야 할 이 타이밍에 꺼내놓는 건지.
기대하고, 실망하고, 또다시 희망을 품는 과정을
반복하며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단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그러나 여행을 망칠 수 없단 생각에
일단 친구의 눈물 어린 호소를 들어야 했다.
그 애는 울먹이며 말했다.
"나도 내가 나쁜 건 아는데...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라고 생각해."
'x랄하네...'
그녀의 변명은 진부하다 못해 측은했다.
어쩜 바람피우는 것들은 하나같이 멘트가 똑같을까.
친구는 스스로까지 속여가며 그 남자를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에 면죄부를 씌었다.
아......
겨우 이 정도의 사람이었다니.
함께한 수년이
온통 부정당한 느낌이 들며 서글퍼졌다.
소중한 친구와 처음으로 함께한 여행이
손절여행이 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지만
마음을 비우고 그저 적당히 비위를 맞춰가며
최대한 여행에 집중하려 애썼다.
겉도는 대화, 공허한 눈빛.
하루 종일 씁쓸한 마음으로 일정을 보내고
돌아온 숙소에서 잠시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좋았던 기억들이 너무도 많았던 탓일까.
미련하게도 한 번 더 친구를 붙잡아 보고 싶었다.
'마지막... 이번이 진짜 마지막.'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예진아, 잠깐 앉아 봐. 얘기 좀 하자."
이후 2시간이 넘는 대화가 이어졌다.
왜 그를 만나면 안 되는지,
떳떳하게 살기 위한 선택이 무엇일지,
왜 스스로 행복할 권리만 내세우며
다른 사람의 권리를 빼앗는지.
지극히 상식적이고 또 당연한 말을
조곤조곤 설명하며 친구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뉘우치고 그만두길 바랐다.
그리고 그 애석한 바램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여전히 그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편지까지 쓰고 있던 친구의 모습을 직관하고 나서야
나는 끝내 품고 있던 실낱같던 희망을 놓을 수 있었다.
사람을 바꾸려 들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여러 번.
나 역시,
아니다 싶을 땐 가차 없이 놓을 때가 많지만
간혹 차마 놓지 못해 질척거리던 이들도 있었다.
“넌 그런 애 아니잖아”라며 매달리거나
'내가 옆에 있으면 돼.'라고 자만하던 시절이.
사람을 설득하고,
바꿔보려 했던 경험들이 남긴 교훈은 단 하나였다.
인간은 절대 바뀌지 않으며
바꿔볼 수 있다는 희망 역시
나의 오만이자 착각이란 것을.
누군가를 구원하려는 뛰어드는 사람들은
대개 그와 함께 가라앉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이들을
몸소 경험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미련이 추잡하게 얽혀있고
수많은 추억이 발목을 잡는대도
결국 끊어내야만 하는 관계는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 속 사람을 잃는 것보다 무서운 건
비굴하고 미련한 나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조심히 들어가라는 친구의 메시지에
예의상 답변을 남기고 휴대폰을 덮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여행이 끝난 것 같았다.
이제 우린 서로의 지난 시절만 공유하는
시절인연이 되겠지만
관계의 불가항력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나의 몫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관계는 얼마나 많이 연결됐느냐가 아닌,
무엇을 내려두어야 하는 지를 알고
그것을 분별할 안목을 길러가는 과정인 것 같다.
그리고 진짜 용기는, 끝까지 붙잡는 게 아니라
멀어져 가는 그의 손을 놓을 줄 아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코 타인을 바꿀 수 없다.
그저 나와는 전혀 다른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진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떠나가버린 인연에,
너무 지쳐 놓아 버린 관계에
자꾸만 뒤돌아보고 싶어질 때면
지난 선택이 나와 당신의,
우리의 최선이었음을 기억하자.
누군가를 바꾸려 들려는 게
얼마나 의미 없고 덧없는 것인지.
있는 그대로 사랑해 버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