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다스리는 법은 없다?

by YUN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한 문장으로 정의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의 정의는 모호하지만
불행만은 무섭도록 선명한 사회


문득 나는 그 속을 매일 뒹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둘, 아.. 세 개나 틀렸어. 미친."


학창 시절, 전교 회장에 전교권을 도맡던 친구가 내게 말했다. 가채점을 하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친구의 눈가엔 슬픔과 좌절이 차올라 떨어졌다.


당황스러웠다.

난 틀린 개수를 합치면

열손가락도 부족한 처지였는데.


살짝 열이 받았지만 불안에 떨며 고통스러워하는 친구가 안쓰러웠다. 명문대를 목표로 하던 친구가 얼마나 간절한지 알았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친구는 늘 불안과 함께했다.

내재한 근심과 두려움이 자신도 모르게 적대심으로 표출되는 듯했다. 성적에 예민했던 친구는 다른 아이들의 성적을 무척 견제했고 필기도 결코 보여주는 법이 없었다.


중간고사를 보기 하루 전,

번호 순대로 책상을 일열 배치하고 있던 그때

친구는 자신의 위치가 앞문 바로 옆자리라며

왈칵 눈물을 쏟았다.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는 이유였다.


"아... 나 어떡해..."


5살 아이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대는 친구를 보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론 얼마나 초조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안쓰러움도 들었다.


"진정 좀 됐어?"


친구는 훌쩍이며 말했다.

"응... 점수 잘 못 받을까 봐 그랬어. 창피하다."


"에이, 이번에도 잘 볼 거야. 전교 1,2등 하면 무슨 기분이냐?"


"그냥 딱 점수표 받았을 때랑 부모님한테 말할 때?

그 순간만 좋아. 별 거 없어."


"뭐? 우씨. 이게 가진 자들의 여유인가. 우리 집은 내가 그 점수 받아오면 현수막 걸 텐데."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당시 내가 '여유'라고 표현한 말의 이면에는 '무감각'이섞여 있었다.


친구는 행복엔 놀라울 정도로 둔했고

작은 불행엔 가혹할 만큼 예민했다.




살다 보면 지나치게 불안이 드러나는 사람들이 있다.


나라고 늘 괜찮은 건 아니었지만, 눈에 보일 정도로 유독 겁이 많거나 결핍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없는 애처로움이 들었다.


나 역시 삶이 무서웠기 때문일까?

왠지 모를 동질감 역시 함께 몰려온다.


우리는 뭐가 그리 두려운 걸까.


나는 오랜 고민 끝에

불안의 씨앗을 어렴풋이 생각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안한 이유는

행복과 직결됐다.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될까 하는 두려움’


그에 대한 강박은

마음을 교묘하게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좋은 점수를 못 받을까 봐, 원하는 대학에 못 갈까 봐..."
"목표를 이루지 못할까 봐, 또다시 실패할까 봐, 사회에서 뒤처질까 봐..."
"사랑받지 못할까 봐, 버려질 까봐, 혼자 남겨질 까봐..."


어쩌면 필사적으로

불행을 막기 위한 견제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린 그토록 두려웠던

고비를 넘겨도 온전히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순간적으로 덮쳐오는 불행을 막았을 뿐.

매일 다른 과제가 주어지는 한,

불안은 지치지도 않고 나를 찾는다.


그렇다면 더는 행복을 원치 않는다면 어떨까?

불행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다면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행복을 욕심내지 않으면, 불행도 따라오지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어느 순간에는 그 생각이 통하기도 했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도 덜했고, 만족을 바라지 않으니 관계는 오히려 가벼워졌고 편해졌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행복하진 않았지만,

더는 불행하지도 않았으므로.


그러나 머지않아 알게 됐다.
애써 비워낸 자리를 어떻게든 채우고자 안간힘 쓰는 나자신과 다시 나를 웃게 해 줄 것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그리고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다시 사랑하며 의미를 찾고 싶어하는 진심을.


사람은 희망과 애정 없이는 더는 내일을 꿈꿀 수 없는 존재였다. 결국 그 결핍은 또 다른 욕망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를 이끌었다.




그러니 누군가 불안을 감수하면서라도 행복을 추구해야 하느냐 묻는다면, 이제 나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근심, 두려움, 초조함, 긴장, 불편함을 모두 아우른

불안은 마음 속에서 지워졌으면 하는,

수많은 감정 중 당연 불필요한 존재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난 그것들과 함께 나아갔다. 예외없이, 새로운 도전과 중요한 선택을 앞둔 날에 늘 그들과 함께 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더 나은 내일과 더 괜찮은 나를 위해.


행복해지려 옮긴 발걸음과 무수한 선택들에

불안은 자석처럼 달라붙었고 서서히 나를 움직였다.


이렇듯 적당한 불안은 두려움을 넘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촉진제 역할을 한다.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불안이, 행복을 누릴 진취적 행동의 기저가 되어 두려운 미래를 계획하고 대비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우린 알 수 없는 내일로

조금 더 의젓히 나아갈 수 있다.

나의 불안과 함께.


행복을 추구하기에,

삶의 욕구와 의욕과 애정이 있기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삶의 의미는 그렇게 태어난다.


과하지 않는 선에서 불안이란 불청객은 분명 필요했다.




우린 늘 최고의, 최적의 정답만을 좇으며 살아가는 듯 하다. 혹여 내가 찍은 답이 틀린 답이면 어쩌나 전전긍하며.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여러 경험을 하며 내가 느낀 점은 행복할 때도 불안은 함께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래서 순간을 온전히 즐기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결국 우린 죽을 때까지 불안을 내칠 수 없을 것이다. 소중한 것이 생기면 사람은 한편으로 겁이 난다. 그것을 지켜야만 하기에. 그래서 설레는 기쁨이 주는 그 이면엔 늘 불안함이 따라온다. 난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더 이상 내 안의 불안을 밀어내기보다 삶의 동반자로 함께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반(反) 취약성'이란 개념을 알게 됐는데, 외부의 혼란이나 압력에 오히려 성과가 상승하는 성질을 뜻한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극과 충격을원동력으로 삼아 성장해 나가는 것.


책에서 읽은 이 용어가 강한 기억으로 남았다. 물건은 압력이나 충격이 가해지면 그대로 망가지기 십상이지만, 우리는 그리 약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나는 넓은 아량으로 충분히 헤매고 부딪히고 멍이 들 시간을 내 삶에 허락했다.


우린 모두 불완전한 존재들이니까.


나도, 당신 옆에 있는 누군가도,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저 사람도,

심지어 동경하는 그 사람도.


그래도 꼬박 밥을 챙겨 먹고 소중한 이들을 만난다.

결코 그것에 집어삼켜지지 않는다.

불안을 딛고서가 아닌 품고서 살아간다.

내 안에 불안이 있다는 사실에

이제 더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


결국 우리가 그토록 불안한 이유는

나의 삶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반증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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