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챙김보다 먼저 해야 할 일

by YUN



“넌 너 자신을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
나쁘다는 게 아냐. 그게 부러워.


우연히 친구의 입을 통해 들은 말이 한동안 생각났다.

이 말을 듣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흔히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선 나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들 한다. 자존감, 마음 챙김과 같은 단어들이 판을 치는 추세에 진짜 나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오히려 혼란스럽기도 했다.


자기 관찰자의식 과잉.

그 사이를 넘나들며 사는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만

지나치게 자신에 취해있는 사람 역시 어딘가 별로다.


이를 의식해서일까?

나에 대해 깊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이상하게 더 나를 잃어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생각이 많아지니 오히려 단순한 것들도

복잡하게 느껴졌다.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

라는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람은 너무 입체적이고 복잡한 존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 나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스스로 던진 이 질문은 내 안에서 오래 머물렀고

관계에서 혼란을 느낄 때마다, 삶이 엉켜버릴 때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나를 아는 일은, 결국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의 시작점과 마주하는 일이었다.


기분이 나빴던 이유, 서운했던 이유, 불편했던 이유.


스스로조차 모호한 감정을 끌어안은 채 '왜 저 사람은 나를 몰라줄까' 하는 반복되는 기대와 실망들로 인해

지쳐갔다. 그렇게 결국 타인에게 부정적 감정을 전가시키고 말았다.


나를 모르니, 나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고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얕기에 상대를 헤아릴 그릇의 폭도 좁았다.


내 감정을 알아본 만큼, 상대에게도 공감할 수 있다는 걸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어렴풋이 깨달았다.


또한 기준이 없으면 무섭도록 타인의 말에 휘둘리게 된다. 중심이 없다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다.

어디든 흘러갈 수 있지만 언제든 추락할 수도 있다.


주변 환경과 반응에 과도하게 민감해지고 필요 이상으로 흔들리는 것도 결국 같은 이유다. 내 안에 기준이 있다면 선택지가 생긴다.


내 앞에서 떠들어대는 저 인간의 말을

조언으로 받아들일지, 상처로 남겨둘지.


나를 이해한 만큼 타인도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가장 깊은 공감은, 스스로를 이해할 때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어릴 적 내 모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까 좀 바보 같았어.'

'그 행동 너무 찌질해 보였을 거야.'

'오히려 그 말이 더 없어 보이지 않았을까.'


어렸던 나는 주변 시선이 너무 중요했다.

그래서 철저히 스스로를 검열했다.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법도, 나를 위로하는 법도 몰랐다. 남들 앞에서 울면 지는 거였다. 그때 내 논리로 그건 분명 패배였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울컥울컥 차오르는 마음을 억눌러 시간을 죽였다. 눈물을 꾹 참고 집 안 모두가 잠들 때까지 기다린 후 컴컴한 이불속으로 도망쳤다.


'이제 울어도 돼.'


유일하게 허락된 그 좁은 공간에서 숨죽여 울었다.

그게 어린 내가 주변 세상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는 방법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엔 글로 도망쳤다.

일기장은 혹여 누가 볼까, 휴대폰 메모장을 택했다.

답답한 마음과 누군가를 향한 미움을 메모장에 쏟아내고 나면 한결 편했다.


글로 대화했고 글로 화해했다.

글은 내게 최선의 위로였다.


좀 더 시간이 흘러서는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까, 걔가 나를 싫어해서 그랬던 걸까?"


방에서 홀로 중얼거리듯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며생각을 정리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성인이 된 이후에는 나와 습관적으로 대화를 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점심시간에 동료들하고 시간 보낸 거 정말 좋았지.'

'아까 그 말은 하지 말걸, 이미 다 까먹었겠지만. 담부턴 조심하자.'


하루를 돌아보며 동시에 나를 돌아봤고,

조용히 다독였다. 그렇게 좋은 순간을 간직했고

맘에 들지 않는 실수는 줄여나갔다.




일본의 유명한 카피 문구가 있다.


'저 사람도 한잔 해보면 좋은 사람일지 몰라.'


나는 이 말을 나에게 적용했다.

스스로 어딘가 별로인 모습도 두런두런 대화로

풀어가다 보면 응어리가 풀어지는 듯했다.


예뻐해주진 못해도,

정성껏 미워하지도 않게 어설픈 나와 마주 봤다.


여전히 서툴고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임은 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대화를 통해 내가 느낀 건

난 어제보다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스스로를 알아가려 애쓰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일 것이라는 점이다.



하루는 직장동료가 물었다.


"노래방 가는 거 좋아하면서 왜 혼자는 안 가요?"


"이상하게 혼자 가면 재미가 없네요."


나는 혼자 뭔가를 하는 걸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혼자 밥을 먹는 것도

혼자 여행을 가는 것도

혼자 영화를 보는 것도.


썩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혼자 즐기지 못한다는 사실이 딱히 대수롭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나와 했던 대화 중 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난 혼자서 즐기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나와 친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와 함께 정서적 교류를 주고받는 걸

훨씬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이 하면 더 좋다.

그건 그리 이상한 게 아니다.

난 그런 취향의 사람이니까.'




스스로의 결핍과 약점, 못난 점은 누구나 갖고 있다.

또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어렵고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자신에 대한 관찰, 회고, 기록, 대화, 반성, 화해보다는 차라리 미워하는 걸 선택한다.

가장 쉽고 편한 방법으로 나를 외면하는 것이다.


나 역시 솔직한 감정과 내 약점을 마주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니, 지금도 어렵다.


최근까지도 나는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이제는, 이제는 좀 괜찮아진 줄 알았다.


시간이 꽤 흘렀고, 더디게 나이를 먹었고,

나 자신과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눴으니까.


그러나 처음 보는 타인의 앞에서 나도 몰래 새어 나온 눈물을 마주하고서야 알았다.


여전히 난 괜찮지 않았다.


민망함으로 황급히 눈물을 훔쳤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건들기 아픈 부분은 나 역시 슬며시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린 타인을 넘어 스스로조차 속이기 너무 쉬운 환경에 있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들여다봐야 한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보듬어주지 않을 테니.

아픈 상처도 치부도, 그게 뭐든 간에 적어도 나한텐 솔직해야 하지 않을까.


평생을 살아도 자신을 온전히 알기는 불가능의 영역일지 모른다. 그러나 난 내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시도를 오래도록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난 아직 나와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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