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료의 생각 없는 생각<에 대해 생각하기
"Being yourself, not being someone."
이효정, 필명 료. 그녀가 2025년 6월 펴낸 산문집 『료의 생각 없는 생각』의 표지에 적힌 문장이다. '생각 없는 생각'이라는 역설적 제목, 자신을 '가장 좋은 레퍼런스'로 삼으라는 철학. 40대 후반에 첫 브랜드를 열어 2000억 원의 성공 신화를 쓴 창업가의 기록.
그런데 한 달 뒤인 7월 16일, 그녀가 만든 회사 런던베이글뮤지엄 인천점의 숙소에서 스물여섯 청년이 심정지 상태로 발견되었다. 주 6일 최대 하루 17시간 근무, 월 247시간 노동. 한여름, 에어컨 없는 숙소. 그가 남긴 메시지: "오늘도 하루 16시간 반 일했다."
책 출간 한 달 만에 벌어진 죽음. 이 시차는 우연이 아니다. '생각 없음'이라는 말의 이중성이, 마치 명리학의 천간(天干)과 지지(地支)처럼, 하나는 하늘에서 빛나고 하나는 땅속에 묻혔다. 나는 인문명리학인으로서 묻는다. 료가 말한 '생각 없는 생각'은 진정 생각 없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생각이 있되 다른 곳을 향한 것이었는가?
명리학에서 사주는 천간(天干) 네 글자와 지지(地支) 네 글자, 총 여덟 글자로 구성된다. 천간은 '드러난 것', 표면, 의식, 말, 이상이다. 지지는 '숨겨진 것', 실체, 무의식, 행동, 현실이다. 건강한 삶은 천간과 지지가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내가 말하는 것(천간)과 내가 행하는 것(지지)이 일치할 때, 그 사람의 사주는 '통근(通根)'한다고 표현한다. 뿌리가 땅에 닿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료의 언어는 천간에만 머물렀다.
"생각 없이 사세요", "당신 자신이 되세요", "레퍼런스는 당신"—이 말들은 아름답다. 자기 계발서 특유의 경쾌함으로 독자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러나 지지, 즉 그녀가 실제로 만든 노동 시스템은 어떠했는가? 주 6일, 하루 17시간, 에어컨 없는 숙소, 월급 체불. 이것은 '당신 자신'이 될 수 없는 구조다. 오직 '회사가 원하는 누군가'가 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구조다.
천간과 지지의 불일치. 명리학에서 이를 '虛浮(허부)', 즉 뿌리 없이 뜬 상태라 부른다. 말은 화려하나 실속이 없고, 이상은 높으나 현실은 피폐하다. 료의 '생각 없는 생각'은 천간의 언어였을 뿐, 지지의 현실에서는 철저히 '생각 있는 착취'라고 볼 수밖에 없다.
료는 자신의 철학을 '무심(無心)'의 언어로 포장했다. 선불교의 무심, 장자의 소요유, 노자의 무위자연. 동양 사상의 정수를 빌려, '생각 없음'을 미덕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명리학적으로 무심(無心)과 무책(無責)은 전혀 다른 오행의 작동이다. 진정한 무심은 오행 중 '수(水)'의 작용이다. 물은 형태가 없으나 모든 형태를 담는다. 집착을 버리되 책임을 저버리지 않는다. 노자가 말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는 것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이롭게 함(利)'이라는 적극적 책임이 전제되어 있다.
반면 료가 보여준 것은 '화(火)'의 일방적 발산이었다. 화는 타오르고 빛나나, 타인을 태울 수도 있다. 자신의 열정과 성공 서사로 책을 채우고, SNS를 달구었으나, 그 불길이 직원들을 어떻게 태우고 있는지는 '생각 없이' 지나쳤다.
이것은 무심이 아니라 무책이다. 생각 없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선택적 무감각이다. 명리학에서 화는 지나치면 '염상(炎上)', 즉 제어 없이 타오르는 불이 된다. 료의 브랜드는 빠르게 확장했고, 미디어는 그녀를 '여성 창업가의 아이콘'으로 호명했다. 그러나 그 불빛 아래 그림자에서, 청년들은 탈진해 갔다.
그렇다면 진정한 '생각 없는 생각'이란 무엇인가? 나는 명리학의 상생(相生) 원리에서 답을 찾는다.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 오행은 서로를 살린다. 한 요소의 번성이 다른 요소의 고갈로 이어지지 않는다.
나무는 불을 피우되 자신도 성장하고, 불은 흙을 비옥하게 하며, 흙은 금을 품고, 금은 물을 맑게 하고, 물은 다시 나무를 적신다.
료가 진정으로 '생각 없이' 살았다면, 자신의 성공이 직원들의 고통 위에 세워지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알았으나 '생각하지 않기로' 선택했을 것이다. 이것은 명리학에서 말하는 '상극(相克)'의 폭주다.
불(火)이 금(金)을 녹이듯, 경영자의 열정이 노동자의 몸을 녹였다. 상극은 필요하다. 하지만 제어되지 않은 상극은 폭력과 파괴다.
진정한 생각 없음은 오히려 깊은 '생각 있음'의 다른 이름이어야 한다.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은 쓸모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를 '생각'한 끝에 도달한 통찰이다. 료의 생각 없음은 타인의 쓸모에 대해서는 철저히 '계산'하면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 없이' 모른 체한 이중성이었다.
나는 료의 사주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의 '삶'이라는 텍스트는 이미 명리학적 상징으로 가득하다. 지나친 화(火)의 기운, 뿌리 없는 천간, 상극의 폭주. 이것은 사주가 삶을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명리학적 불균형의 전형을 드러낸 것이다.
"사주로 삶을 판단하지 말고, 삶을 사주로 해석하라." 이것이 인문명리학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료를 단죄하기보다, 그녀의 삶을 통해 현대 한국 사회의 '성공 신화'가 얼마나 위험한 불균형 위에 서 있는지 해석해야 한다.
창업주의 열정(火)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것이 노동자의 생명(水)을 증발시킨다면 멈춰야 한다. 생각 없는 경영은 없다. 있다면 그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경영'이다.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천간과 지지의 불일치가 빚어낸 필연적 파국이었다.
료의 책은 여전히 서점에 있다. 그러나 그 책장을 넘기는 우리는 이제 알아야 한다. 진정한 '생각 없음'은 책 속이 아니라 현장 속에 있다는 것을. 말이 아니라 행동 속에 있다는 것을. 천간이 아니라 지지 속에 있다는 것을.
당신 자신이 되세요. 하지만 당신의 성공이 누군가를 소진시키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시스템의 괴물이 된 것이다. 생각 없음과 생각 있음의 경계는 종이처럼 얇다. 그 경계에서, 한 청년이 쓰러졌다. 지금 세상엔 인간다움이라는 생각 있음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