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편의점에 '독고'가 들어왔다

- 김호연 작가의『불편한 편의점』을 인문명리학의 눈으로 읽는 밤

by 덕원

언제부터였을까. 내 삶이 24시간 불은 켜져 있지만, 어쩐지 매일 똑같은 물건들만 진열된 편의점 같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동선으로 움직이고, 예측 가능한 관계 속에서 예측 가능한 감정을 소비하는 날들. 안정적이었지만, 누구도 선뜻 문을 열고 들어오고 싶어 하진 않을, 그런 고요하고 심심한 공간. 저는 제 삶의 점주가 되어, 매일 ‘결손’ 없는 하루를 보내는 것에만 안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밤, 저는 김호연 작가의 『불편한 편의점』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죠. 제 삶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완벽한 재고관리가 아니라, 이 모든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지도 모를 ‘불편한’ 손님이었다는 것을.


서울의 낡은 동네, 그곳에 자리한 작은 편의점은 단순한 소설의 배경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온 우주의 기운이 잠시 머물다 가는 정거장이자, 우리 삶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오늘 밤, 이 작은 편의점을 인문명리학의 눈을 빌려 들여다보며, 당신과 나의 삶에 불쑥 찾아온, 혹은 찾아올 ‘독고 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명리학에서 ‘토(土)’의 공간은 모든 것을 중재하고 연결하는 플랫폼입니다. 소설 속 편의점이 바로 그런 곳이었죠.



모든 것은 '편의점'이라는 공간에서 시작되었다.


명리학에서 세상을 이루는 기본 원소인 다섯 기운 중 '토(土)'는 특별한 역할을 맡습니다. 봄의 나무(木)와 여름의 불(火), 가을의 쇠(金)와 겨울의 물(水)이 순환할 수 있도록 계절과 계절 사이를 잇는 환절기.

즉, 모든 기운이 잠시 멈춰 다음을 준비하고, 서로의 에너지를 교환하는 ‘플랫폼’입니다.


『불편한 편의점』의 ‘ALWAYS 편의점’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곳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공간을 넘어, 온갖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며 자신의 기운을 내려놓고, 타인의 기운을 얻어 가는 우리 시대의 ‘토(土)’인 셈이죠.


점주인 염 여사는 이 땅을 지키는 주인입니다. 그녀의 원칙과 질서는 이 공간의 ‘규율’로서, 명리학의 '정관(正官)과 정재(正財)' 기운을 닮았습니다. ‘정관’은 안정된 시스템과 예측 가능한 규칙을 선호합니다. 정재’라는 매일 같은 시간에 문을 열고,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아르바이트생을 관리하는 그녀의 모습이 편의점이라는 작은 왕국을 지탱하는 바른 기둥이었죠. 하지만 너무 반듯한 기둥만으로는 새로운 바람이 들어올 수 없는 법. 그녀의 왕국에는 균열이 필요했습니다.



502.png 때로는 내 삶의 문을 두드리는 가장 낯선 손님이, 가장 절실한 선물일지 모릅니다.


내 것을 빼앗는 별, 겁재(劫財)의 등장


어느 날, 이 안정된 왕국에 정체불명의 사내가 들어옵니다. 알코올성 치매로 기억을 잃은 노숙자, 독고. 그는 염 여사의 지갑을 찾아준 인연으로 야간 아르바이트생이 됩니다. 명리학적으로 ‘독고’는 아주 흥미로운 캐릭터입니다. 그는 ‘겁재(劫財)’라는 별의 기운을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겁재’라니, 이름 한번 살벌하죠? 한자 뜻 그대로 ‘재물을 겁탈하는’ 별입니다. 사주에 이 별이 있으면 보통 내 것을 빼앗아가는 경쟁자, 예측 불가능한 라이벌로 해석되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겁재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겁재의 진짜 힘은 ‘파괴’가 아닌 ‘자극’에 있습니다.


그는 안락한 내 세계에 불쑥 들어와 나의 것을 빼앗고 흔들어 놓지만, 바로 그 과정에서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젖히는 ‘메기’ 같은 존재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독고는 편의점의 ‘안정’을 빼앗았습니다. 어눌한 말투와 굼뜬 행동은 효율을 중시하는 편의점의 룰을 어겼고, 그의 정체는 손님들에게 불안감을 주었죠. 그는 염 여사의 ‘평온’을, 동료 아르바이트생의 ‘안일함’을, 손님들의 ‘무관심’을 빼앗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비어버린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채워 넣었습니다. 참참참 소시지와 옥수수수염차를 조합하는 엉뚱함으로 손님의 마음을 얻고, 퉁명스러운 위로로 누군가의 상처를 보듬었죠. 그의 ‘겁재’적 등장은, 멈춰 있던 편의점의 시간을 흐르게 만든 가장 강력한 자극적 동력이었습니다.


503.png 때로는 가장 이질적인 존재가 시스템 전체를 숨 쉬게 하는 창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손님이다


편의점의 문을 여는 손님들은 저마다 다른 오행의 기운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 청년(�나무), 가족을 위해 고단한 하루를 버티는 가장(⚔쇠), 아들과의 갈등으로 힘겨워하는 엄마(�불),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외로운 이(�물). 이들은 모두 편의점이라는 ‘땅(土)’에 모여듭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독고라는 ‘겁재’를 만나면서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다는 점입니다. 겁재는 정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익숙한 판을 흔들어 버리죠.


그의 서툰 행동은 오히려 손님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고, 타인의 삶에 한 발짝 다가설 용기를 줍니다. 이것이 바로 겁재의 역설적인 힘, ‘상생’의 드라마입니다. 멈춰 있던 물(고민)은 나무(성장)를 키우고, 뜨거운 불(갈등)은 쇠(원칙)를 단련시켜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냅니다.



504.png 한 사람의 작은 변화가 얽히고설킨 관계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불편한 편의점’을 열어두는 일


책을 덮으며 저는 제 삶의 편의점을 다시 한번 둘러봅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만, 어쩐지 온기 없이 서늘했던 이곳. 저는 그동안 내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 ‘겁재’의 방문을 애써 외면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예측 불가능한 만남, 상처받을지도 모를 관계, 실패할지도 모르는 도전 말입니다.


『불편한 편의점』은 명리학의 언어를 빌려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인생의 전환점은 종종 가장 불편한 손님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고. 나의 질서(정관)를 흔들고, 나의 재물(재성)을 위협하는 ‘겁재’의 등장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가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갈 때, 비로소 당신은 더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는 빈자리를 갖게 될 것이라고...


오늘 당신의 편의점에는 어떤 손님이 다녀갔나요? 혹은, 당신은 누군가의 편의점에 예고 없이 들른 ‘독고’가 되어준 적은 없나요? 우리는 모두 서로의 삶에 예고 없이 들르는 손님입니다. 기꺼이 불편해질 용기를 낼 때, 우리의 24시간은 비로소 온기를 품고 다시 흐르기 시작할 겁니다.


이제 저는, 제 삶의 편의점 문을 조금 더 활짝 열어두기로 했습니다. 어떤 불편한 손님이 찾아와 제 고요한 왕국을 발칵 뒤집어 놓을지라도, 기꺼이 그와 함께 옥수수수염차를 마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옅은 전깃불이라도 살며시 켜두어야 할 밤입니다. 독고를 기다리는 독고를 닮은 영혼을 다독이며 말이죠!



505.png 당신의 삶이라는 무대에, 다음은 어떤 인물이 등장할 차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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