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편. 파열음의 미학, 폐허 위에 세운 그들만의 극장

홍상수, 김민희 불륜과 사랑 사이 그들만의 우주에서

by 덕원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가?


어떤 스캔들은 그 사회의 가장 예민한 환부를 건드리는 진단서가 된다. 홍상수와 김민희. 두 사람의 이름은 이제 단순한 영화감독과 배우의 명칭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도덕적 마지노선을 시험하는 일종의 기호가 되었다.


대중은 이들을 '불륜'이라는 병리학적 언어로 진단하고 격리하려 들지만, 질병은 언제나 은유다. 그들의 관계가 우리 사회의 암적인 존재라면, 그 암세포는 경직된 집단주의와 억압된 개인의 욕망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필연적 돌연변이일지 모른다.


예술가에게 윤리란 지켜야 할 성벽인가, 아니면 넘어야 할 국경인가. 두 사람의 명리학적 설계도를 겹쳐 놓으면, 이 위험한 질문에 대한 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들은 서로를 파괴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기이하고도 매혹적인 '몰락의 공범자들'이다.


1. 사적(私的)인 태양의 추락 - 일상의 균열을 응시하다


홍상수 감독은 '병술(丙戌)일주'다. 태양(丙火)의 기운을 타고났으되, 그 태양은 중천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쪽 산너머, 땅속의 창고(戌土)로 스며들고 있다. 명리학에서는 이를 '백호(白虎)'라 부르며, 강렬한 에너지가 묘지(Grave)로 들어가는 형국이라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빛은 광장을 비추는 공적인 빛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태양을 지극히 사적이고 폐쇄적인 내면의 동굴로 끌고 들어간다. 그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그 집요한 자기 복제와 일상의 현미경적 관찰은 바로 이 '입묘(入墓)하는 태양'의 시선이다. 그는 영웅적 서사나 거대 담론을 비웃는다. 대신 술토(戌土)라는 창고 속에 숨겨진, 찌질하고 남루한 인간의 본능을 끄집어내어 스크린에 전시한다.


조후론적 관점에서 그의 태양은 지나치게 뜨겁고 건조하다. 이 조열한 불기운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식혀줄 차가운 금속이나 물을 갈구한다. 그러나 그의 사주에서 사회적 규범을 상징하는 물(관성)은 멀고 약하다. 그는 도덕이라는 댐으로 막을 수 없는 용암이다. 그가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술에 취한 인물들을 통해 위선을 까발리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이 뜨겁고 불편한 불기운을 해소하기 위한 유일한 제의(提議)일 것이다.



태양은 땅속으로 숨을 때 가장 붉고 위험하다. 그의 예술은 그 위험한 일몰의 기록이다.



2. 사막에 내리는 비 - 증발함으로써 존재하는 뮤즈


반면, 김민희는 '계미(癸未)일주'다. 계수(癸水)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이자 안개다. 형체가 없고, 스며들며, 부드럽다. 그러나 그녀가 내려앉은 땅은 미토(未土), 한여름의 뜨거운 사막이다.


이것은 구조적으로 매우 가혹한 배치다. 비가 내리자마자 뜨거운 흙에 닿아 순식간에 증발해버리는 형국이다. 일지(日支)에 놓인 '편관(偏官/未土)'은 그녀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스트레스이자, 동시에 그녀를 규정하는 강력한 남성적 권력, 혹은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힘을 상징한다.


그녀의 계수(Water)는 홍상수의 병화(Fire)를 만났을 때, 역설적으로 가장 극적인 존재감을 획득한다. 이를 단순히 '잘 맞는 궁합'이라 부르기엔 너무 위태롭다. 차라리 이것은 불 속에 뛰어드는 나방, 혹은 뜨거운 돌 위에서 춤추며 사라지는 물방울에 가깝다.


홍상수의 뜨거운 열기(丙)는 김민희라는 수증기(癸)를 가장 화려하게 피어오르게 만든다. 그녀는 홍상수라는 세계 안에서 자신을 소멸시킴으로써 비로소 예술적 영생을 얻는다. 대중은 그녀가 착취당한다고 말하거나, 반대로 그녀가 그를 홀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명리학적 시선으로 볼 때, 그녀는 그 뜨거움 없이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힘든 '증발의 미학'을 타고난 존재다.




그녀는 소멸을 통해 완성된다.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자신의 증발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3. 비진지함의 진지함 - 도덕의 중력 밖으로


이들의 행보는 일종의 '캠프(Camp)'적 감수성을 띠고 있다. 캠프란 "부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사랑, 기교와 과장에 대한 사랑"이다. 그들은 대중이 요구하는 '반성하는 죄인'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거부한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스캔들을 영화라는 인공적인 세계로 끌고 들어가, 그것을 반복하고, 변주하고, 전시한다.


한국적 도덕관에서 '불륜'은 은폐해야 할 치부다. 하지만 이들은 그 치부를 예술의 재료로 삼음으로써 도덕의 권위를 조롱한다. 홍상수의 '식상(표현욕구)'은 사회적 합의인 '관성(도덕)'을 정면으로 타격한다. 김민희의 '편관(나쁜 남자)'은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기둥이 된다.


이들의 결합은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적 도덕관과 예술가의 나르시시즘적 자유가 충돌하는 최전선이다. 대중은 그들에게 돌을 던지면서도, 그 돌에 맞으면서도 피 흘리지 않고 오히려 그 피로 그림을 그리는 그들의 태도에 기이한 매혹을 느낀다. 그것은 우리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해왔던 에고(Ego)의 가장 솔직하고 뻔뻔한 발현이기 때문이다. 사진이 현실을 포획하여 박제하듯,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영화 속에 박제함으로써 도덕적 비난을 미학적 오브제로 변환시켜 버렸다.



그들은 세상을 등지고, 자신들이 만든 스크린만을 응시한다. 이것은 오만인가, 아니면 유일한 구원인가.


4. 결론. 폐허 위에 세운 그들만의 요새


두 사람의 사주는 서로에게 '독(毒)'이자 '약(藥)'이다. 홍상수의 조열한 흙은 김민희의 물을 말려버리고, 김민희의 차가운 물은 홍상수의 불을 위태롭게 한다. 명리학적으로 이 결합은 '해로(偕老)'하기 힘든 구조다. 서로가 서로를 갉아먹으며 에너지를 태우는 형국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예술이 된다. 안정적인 관계에서는 나올 수 없는 긴장과 파괴 본능이 그들의 창작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덕적 파산이라는 폐허 위에 자신들만의 요새를 세웠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수 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도덕은 필수불가결하니까.


하지만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어떤 예술은, 그리고 어떤 사랑은, 윤리적 판단이 멈추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 그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들의 도덕은 안전해서 행복한가? 우리는 위험해서 살아있다."


그들의 사랑이 해피엔딩일 리는 없다. 명리학적 시나리오는 이미 그 끝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그 파국조차 그들에게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미학적으로 소비될 것이다. 삶을 은유로 치환해버린 자들에게, 고통은 그저 또 다른 컷(Cut)일 뿐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요새에서 사랑의 해피엔딩을 지금 이 순간도 믿고 있을 것이다.





이 차가운 해부를 통해 본 두 사람의 관계는 '도덕에 대한 미학적 저항'입니다. 홍상수의 병화(丙火)와 김민희의 계수(癸水)가 만난 이 현상은, 한국 사회가 허용하는 '예술가의 예외 상태'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시민으로서의 죽음을 불사하고, 사적 예술가로서의 구원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비록 파멸로 가는 길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