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카우>
(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 (William Blake: Proverb of Heaven)
미니멀리스트이기도 하고 리얼리스트인 라이카트는 아날로그적 화면에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위대한 미국적 역사(신화)에서는 취급되지 않았던 평범한 서부의 개척민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대사는 최소한으로 생략되고 마치 맑은 물방울들이 튀는 듯한 음악은 심플하고 영롱한 피아노 선율뿐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원주민들의 언어를 번역 없이 들려주고 마당에는 흙을 파헤치는 개와 뒤뚱거리는 오리가 있고 밤에는 부엉이, 고양이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낙엽으로 덮인 질척거리는 땅,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그 위를 떠가는 나룻배, 어딘가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는 인디언 여성들이 등장하는 서부극. 이렇듯 서정적이고 느린 미국의 개척사가 <퍼스트 카우>이다.
영화는 현대를 경유해서 과거로 거슬러 간다. 역사를 보는 방식이다. 사공이 나룻배 머리맡에 개를 앉히고 노를 저었던 강에는 컨테이너에 물건을 가득 실은 화물선이 지나간다. 그 시절 그토록 풍성하고 짙푸르던 강가 숲의 나무들은 사라져버리고 황량하게 비어있는 마른 땅에 물기 없는 풀들이 듬성듬성 나 있다. 이곳에 여성이 데리고 온 개가 유난히 한 지점의 냄새를 맡으며 땅을 파기 시작한다. 의아한 마음에 여성이 두 손으로 그 자리를 헤쳐보니 가지런히 누운 두 구의 유골이 나타난다. 역사가가 아니라 여성과 그저 하급 동물에 불과했던 개가 묻혔던 역사를 들춰내고, 영웅이 아니라 보잘 것 없었던 두 사람의 삶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시간은 1820년 초기 서부개척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존 레이먼드의 단편소설 <The Half-Life>를 각색한 영화 <퍼스트 카우>는 불과 반평생(half-life)의 삶을 마친 어느 두 남자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1820년대 미국 북서부 오리건 준주가 배경인 이 영화는 모피를 얻기 위한 비버 사냥꾼들의 탐욕과 폭력이 가득했던 초기 서부개척 시대에 소외되고 곤궁했던 두 사람 사이에 피어난 따뜻한 우정을 그린다.
비버 사냥꾼들의 요리를 담당하는 유대인인 쿠키의 본명은 오피스 피고위츠이다. 다 헤진 옷과 손싸개로 추위를 견디는 그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딱할 지경이다. 사냥꾼들은 먹을 식량이 거의 바닥이 나자 만만한 쿠키에게 홧풀이용 폭력을 휘두르려 하기 일쑤다. 도망치듯 먹을거리를 찾아 숲속으로 향한 쿠키는 언제 줄행랑을 쳤나 싶게 찬찬히 나무 밑에 난 노란 버섯을 따서 향기를 맡기도 하고 맛도 보며 주워 담는다. 그러다가 몸이 뒤집혀 있는 도마뱀을 보고는 몸을 제대로 뒤집어주어 목숨을 구해주기도 한다. 그러던 중 러시아인 사냥꾼들에게 쫓겨 벌거벗은 채 풀숲에 숨어있던 킹 루를 구해준다.
2년 후 우연히 허름한 선술집, 그저 힘센 자가 이기는 주먹이 무기이다. 그때 헤어졌던 쿠키가 한 구석에 앉아 있던 킹 루를 다시 만나게 되고 킹 루는 숲속의 허름한 오두막에 쿠키를 초대한다. 잠시 후 화면에는 장작을 패는 킹 루가 보이고 흙바닥을 쓸고 문턱에서 담요를 털고 어디선가 꺽어 온 꽃으로 집을 장식하는 쿠키가 보인다. 서로 외톨이였던 두 사람이 각자의 역할을 맡아 한 팀이 된다.
어느 날 마을의 책임자인 영국인 팩터 대장(토비 존스)이 티(tea)에다 넣어 먹을 우유를 얻기 위해 동부에서 암소 한 마리를 데리고 온다. 선술집 사나이들이 비아냥거리며 떠들어 대듯 그 마을에는 애초에 없던 백인처럼 오리건주에 처음으로 등장한 암소는 사람보다 더 귀하게 관리가 되고 쿠키와 킹 루도 우연히 그 암소를 보게 된다. 우유만 있으면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쿠키의 말에 킹 루와 쿠키는 암소의 우유를 훔쳐서 빵을 만들고 빵은 대번에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게 된다.
만사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결국 그들의 우유 도둑질이 들통나고 마을 권력자의 재산을 훔친 죄의 값은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다. 자신들을 찾아 나선 팩터와 부하들을 피해 킹 루는 강물에 뛰어들고 도망가던 쿠키는 숲의 높은 바위에서 떨어져 머리에 중상을 입는다. 정신을 잃은 쿠키를 구한 것은 어느 인디언 노파와 여인이다. 여인의 집을 빠져나온 쿠키를 숲에서 만난 킹 루는 다친 쿠키를 데리고 안전한 곳을 찾아 발길을 재촉하지만 자꾸 뒤처지는 쿠키를 야트막하고 긴 흙구덩이에 눕히고 자신 옆에 누워 잠을 청한다. 잠시 잠을 청하는 킹루의 표정도 전에 없이 편안하다.
관객은 이미 첫 장면에서 그들의 죽음에 대한 결말은 알고 있었지만 어떤 상황으로 인해 그들이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행보와 함께 총 한 자루를 메고 숲속 다른 곳에서 걷고 있는 어린 한 청년을 교차로 보여준다. 과연 이 두 남자의 죽음이 그 청년의 총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도 정확히 대답할 수 없다. 미개척 시대의 초반. 일확천금의 꿈이 아니라 여행자를 위한 작은 호텔을 꿈꾸었던 쿠키 그리고 작은 농장 갖기를 소원했던 킹루는 총 한 자루 없이 서부를 헤매다가 행운 따윈 손에 쥐어보지도 못한 채 반생을 마쳤다.
총과 권력이 곧 법인 시절. 권력자의 재산인 암소의 우유를 훔친 죄값치고는 너무도 가혹하다. 결국 둘은 같이 숲 속 구덩이에 누워 미국의 땅이 되었다. 킹루는 다친 쿠키를 두고 갈 수도 있었지만 끝내 그를 버리지 않았고 결국 함께 죽게 된다는 비극과 우정이 개척기 미국 역사의 한 조각이 되어 묻힌다. 석화된 거창한 역사보다 위대한 건 흔적으로 남겨진 사람의 온기이다.